제 목 : 2014년도 1월 1째주 - 날로 새로워지자(고후4:1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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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ibleman |
작성일 : 2014-01-05 |
첨부파일: 날로 새로워지자.hwp(45K) |
날로 새로워지자(고후4:16-18)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다. 그러므로 빠른 시간과 세월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이 빠른 세월 속에서 성도들은, 어떤 자세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믿음의 성장과 성숙이 있어야 한다.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날마다 새로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 깊은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고린도서는 사도 바울이 썼다.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어느 시대이든지, 항상 문제를 갖기 마련이다. 앞에서 쓴 고린도전서를 받은 성도는, 바울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였다. 이 말을 전해 듣고 기뻤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하기 위해, 후서를 썼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몰래 숨어들어온, 거짓 스승들과 이단들이, 교인들을 미혹시켰다. 그들은 어떻게 바울이 사도냐면서, 사도직분을 의심하게 했다. 자신이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없지만, 긍휼을 베풀어 주셨다고 했다(4:1).
바울은 성도들을 재차 가르치고, 권면하기 위해, 고린도후서를 기록했다. 특히 복음 때문에 당하는 여러 가지 고난에 대해, 인내와 끈기로 잘 이겨내야 한다고 격려하며, 날로 새로워지라고 권면한다. 그러면 새해를 맞아,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날로 새로워지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1. 겉사람에 매이지 말아야 한다(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바울은 낙심하지 않는 이유를, 먼저 이렇게 말했다.
(4: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했다. 자신은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긍휼이 여겨서 직분을 주셨으니, 낙심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겉사람과 속사람을 비교하면서,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다. 육체는 환난을 당하고, 나이가 들면, 약해지고 쇠퇴하지만, 속사람은 환난 가운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한다. 그래서 힘을 얻게 된다. ‘겉사람은 날마다 낡아진다.’는 ‘육체는 날마다 늙고, 부패한다.’는 말이다.
나이가 30대가 넘었으면, 육체는 늙어가고, 부패한다. 따라서 너무 육체에, 미련두지 말아야 한다. 인생의 평준화의 법칙이 있다. 나이 40이 넘으면, 연애를 잘했던 사람이나, 못했던 사람이나 똑같고, 50이 넘으면, 잘생긴 여자나, 못생긴 여자나 똑같고,
60이 넘으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똑같고, 70이 넘으면, 돈 많은 노인이나, 돈 없는 노인이나 똑같고, 80이 넘으면 살아있는 것이나, 죽은 것이나 똑같다고 한다. 그러기에 더 가졌다고 교만하거나, 자랑할 이유가 전혀 없다. 조금 더 배웠다고, 큰소리칠 것도 없다.
우리는 모두 세월 앞에, 겸손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겉사람은 늙고, 병들게 된다. 그러기에 조금 더 일찍 가나, 조금 더 살다가 가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이 최고라 한다. 그래서 건강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지 다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아무리 건강 건강해도, 그 몸도 역시, 낡아지게 된다. 따라서 내게 부여된 사명이, 끝나는 날,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데, 건강이 우상이 되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게 된다. 따라서 건강이 우상이 되지 않아야 한다. 아무리 건강을 위해, 발버둥 쳐도, 하나님이 허락한 세월을 이길 수 없다.
결국은 때가 되면, 다 떠나가게 된다. 안 죽으려고 난리를 쳤던 진시황제도, 50에 죽었다. 따라서 우리는, 속사람을 날로 새롭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혼을 주셨다. 그런데 영혼이, 죄 때문에 죽었기에, 죄를 용서하러 오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속사람이 살아나기에, 이를 거듭난다고 한다.
성도는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새롭게 만들어 주어, 성령으로 거듭난 속사람은, 세월이 흐르고, 고난이 찾아올수록 강해진다. 속사람의 존재를 믿는 성도는, 낡아지는 겉사람을 바라보며 (1) 창조주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2) 더욱 더 겸손하게 기도해야 한다.
(3) 내세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천국에는 낡아지거나, 죽는 것이 없다. 따라서 성도가 영생한다고 믿는다면, 환난과 역경 속에서, 낙망하지 말고, 날마다 천국을 바라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러기에 환난이나 고난이, 도리어 축복이 된다. 이렇게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다윗 왕이, 궁중의 보석 세공업자를 불러서 지시했다. “나를 위해 반지를 하나 만들어라. 그 반지에는 내가 큰 승리를 거두어, 기쁨을 억제하지 못할 때, 마음을 조절할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어라. 그 글귀는, 내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도, 나를 구해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왕의 명령을 받은 보석 세공업자는, 곧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지만, 왕이 지시한 적당한 글귀가, 생각나지 않아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보석 세공인은 솔로몬 왕자를 찾아가, 도움을 구했다. 솔로몬 왕자는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는 글귀를, 새겨 넣으라고 조언하였다.
그러면 왕께서 승리의 순간에, 이 글귀를 보면, 자만심이 가라앉을 것이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이 글귀를 보면, 이내 표정이 밝아질 것이라고 했다. 과연 그대로 했더니, 그 세공업자가 왕께 상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가 누리는 각종 부귀영화, 역시 곧 지나간다.
각종의 환난과 고통도, 역시 지나가게 되어있다. 그러나 지나가지 않는 것이 있다. 그래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속사람이다. 속사람은 부귀영화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진리와 성령의 거룩함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볼 때, 만들어진다. 따라서 때로 환난도 필요하다. 때로는 고난과 핍박도 필요하다.
그런 환난과 핍박이, 속사람을 새롭게 한다. (고후4:7-10)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성도가 믿음을 지키며, 세상에서 올바로 살아가려면, 많은 환난을 당하게 되지만, 환난 때문에 쓰러지고, 넘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보배이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계시어,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믿음생활을 하기가, 점점 어려워져가는, 마지막시대를 살아가며, 재직임명을 받는 우리가, 옛 사람인 겉사람에 붙들려 있지 말고, 속사람을 날마다 새롭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바란다.
2. 환난에 매이지 말고, 영원한 상을 보고 전진하라(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반드시 환난이 있다. 그러나 ‘환난’은, 잠시 뿐이다.
신앙과 사명에 따라서, 어떤 이는 환난이 작기도 하고, 감당 할 수 없을 정도로, 클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잘 극복하지만, 쓰러지고, 넘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실망하고 낙심한다. 환난 때문에 상처를 입지만, 환난은 ‘잠시’라고 했다. 참으면 반드시 지나간다. 환난은 지극히 짧은 잠시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환난을 이길 수 있도록, 지혜, 믿음, 능력, 피할 길을 준다.
성경을 보면,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은 환난을 받았지만, 멋지게 통과하였다. 환난 때문에 잃어버린 것보다는, 언제나 얻는 것이 더 많았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영광은 영원하다. 영원한 것이 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얻게 한다.
우리가 복음 때문에, 잠시 받는 환난으로,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져야하기에, 환난은 잠시이지만, 그것 때문에 누려지는 영광은 영원하고, 중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도를 하다 먹는 욕은, 잠시이다. 복음을 위해서 핍박을 당하는 것은, 일시적이다.
그런데 하늘에서 누려지는 상은, 영원함을 믿기를 바란다. (마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주님은 박해로 인한 너희 상이, 하늘에서 크다고 분명히 약속했다. (마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지어다 하고” 적은 일에 충성했어도, 많은 것을 맡긴다고 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처럼 하나님은 상주시는 분이다. (계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했다.
시간이 없어 더 이상 살피지 못하나, 하나님은 수없이 많은 곳에서, 충성된 자에게 상을 약속하고 있다. 그런데 그 상의 효력은, 영원하다. 대한민국헌법 11조 3항에는 “훈장 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한다.”고 했다.
나라에서 주는 훈장이나, 상은 받았다고 해서, 어떤 특권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늘의 상은, 그렇지 않다. 그 상은 영원하고, 그 상의 특권도 영원하다. 그러기에 상을 받도록 힘쓰고, 노력해야 한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열심히 충성하면, 구원받는 줄 알고 있다. 아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천국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왜 그토록, 충성하고 봉사해야 하는가? ① 구원의 은혜 감사해서다. ② 상을 받기 위해서다. 그런데 상을 받으려면, 목적이 순수해야 한다.
충성하되, 나도 영광 받고, 하나님도 영광 받고…,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런 충성은, 충성이 아니다. 주님 앞에 숟가락을, 하나 더 얹으려고 하지 말라. 봉사도 헌금도 다 그렇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그 헌신과 봉사로, 내가 높아지고, 남들이 알아주기를 기대하며 한다면, 그것은 상을 얻지 못한다. 사람들은 나를 위한 것인지,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잘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확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구별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했다.
(마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3-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기도도 마찬가지다(마6:5-6). 세상 사람들은 오해한다. 개혁교회는 구제를 별로 안하고, 천주교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오해를 한다. 그러나 정반대다. 한국의 구제 사업과, 자선단체의 약 70%는 개혁교회나, 교회와 관련된 분들이 한다. 천주교는 10%밖에 안 된다. 그런데 세상이 모른다.
천주교 이태석 신부의 영화도, 천주교에서 홍보 전략으로 만들어졌다고 보여 진다. 우리 개혁교회 선교사들은, 그보다 더 크고, 많은 일을 해왔다. 더 많은 순교자들이 있다. 그런데도 왜 보도가 안 되는가? 성경 말씀처럼,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했기에,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엄청나고, 대단한 일을 하고도, 들어내질 않는 것이다. 세상이 알아주던, 안 알아주던 상관없다. 다만 주님 한분만 알면, 된다. 그러기에 가치분별이,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분별해야 한다. 가벼운 세상의 칭찬과 영광을 위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포기할 수 없다.
3.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자(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사도 바울은 우리가, 무엇을 주목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우리 성도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라 했다. 지금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그러면 지금 보이는 것은 무엇이고,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보이는 것은, 이 땅의 부귀영화, 명예와 권세다.
그러나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은, 하늘에서 받을 영원한 영광의 축복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것을 더 바라보는가? 지금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을, 더 중하게 여기지 않는가? 결국에는 없어지고 사라질 것인데, 지금 우리는 눈에 보이는, 부귀영화에 인생을 걸고, 전력질주하고 있단 말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 허망하다. 그렇다면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가?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우리에게 주실 상급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은 인간적인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다. 오직 믿음오로만, 볼 수 있다.
(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이 지은 세계임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육체의 세계만이 아닌, 영의 세계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오직 믿는 자 만이, 육체를 가지고도, 내세를 볼 능력이 있다. 날로 새로워지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겉사람에 매이지 말고, 속사람을 생각해야 한다. 잠시를 생각하지 말고, 영원을 생각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보이는 것을 생각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강해지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 길은 말씀을 늘 묵상하면 된다. 상급을 주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면 된다. 또한 강력한 기도를 통해, 의심을 몰아낼 때, 우리의 믿음은 강해질 수 있다.
우리는 바라보는 것을 얻게 되어 있다. 바라보면 닮게 되어 있다. 땅을 바라보면, 땅을 밟게 되어 있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된다. 환경 때문에 자꾸만 환경을 바라보지 말라. 환경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서는, 보이는 것을 자꾸 놓아야 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자꾸 붙들어야 한다. 그래야 새롭게 될 수 있고, 더욱 성숙해질 수 있으며,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더 좋은 것들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자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약속을, 속히 이루어주지 않았다. 그때마다 아브라함은, 보이는 것들, 대체물들을 붙잡았다. 처음에는 조카 롯을 붙잡았고, 자신의 충성된 종, 엘리에셀을 붙잡았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엘리에셀이 그의 후사가, 될 수 없다고 말씀했다. 그러자 그는, 하갈을 통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붙잡았다. 하나님은 이스마엘까지 놓아 버리도록 명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가 붙든 것이 이삭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삭까지도 놓게 만드셨다.
보이는 것을 놓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온전히 붙들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돌려주었고, 영원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을 붙들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기를 바란다.
따라서 힘들고 어려운 이 시대에, 나를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을 바라보기 바란다. 우리의 앞에서,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하는,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전진하기를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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