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40609 복음과 침례(벧전3:18-22) | |
작성자 : 윤성은 | 작성일 : 2024-06-20 |
첨부파일: 복음과 침례(주일).hwp(94K) |
(18-22)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는, 초대교회가 추구한, 설교와 예배로 돌아가자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방법을, 성경은 2가지로 말한다. ① 말로 전한다. ② 보이는 성례(침례, 성찬)로 전한다. 기독교의 거룩한 예식인 성례에는, 침례와 성찬 2가지가 있다. 성례가 중요한 이유는, 복음을 몸으로 깨닫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성례는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잘 보여준다.
1. 죄를 위한 죽음의 복음(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하나님은 죄가 없는 거룩하신 분이기에, 구원은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 인간은 종교 행위나, 인간의 선행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말씀은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따라서 죄를 용서받으려면, 죄 없는 분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어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의인이신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었다. 두 번 다시 죽을 이유가 없는, 완전한 방법으로 구원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기 위해 오셨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은, 분명한 목적이 있다. 예수님이 인간을 사랑하기에, 자기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놓기 위해 오셨다. 그 죽음은 의인으로, 불의한 자를 대신했다. 여기서 의인은 단수고, 불의한 자는 복수다. 예수님만 의인이고, 나머지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예수님은 죄인의 죄를 지고 대신 죽으셨다. 예수님은 의롭지 못한 우리 죄를 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죽임당했다. 예수님은 기절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돌아가셨다. 또한 부활하셨다.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옥’(퓔라케)은, 연옥이 아니라, 감옥이다. 연옥은 인도의 ‘자이나 종교’에서 들어왔다. 연옥은 천주교회에서, 면죄부 판매를 허용하면서 교회 안에도 나타났다. 죽은 자를 위해, 산 자가 공덕을 쌓으면, 구원될 수 있다면서, 많은 돈을 거뒀다.
그러나 성경은 사후 구원의 가능성을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옥에 갇혀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케륏소, 공포했다, 알렸다). 복음을 전했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죽고, 부활 승리하심을 알렸다. 불의한 자들의 죄를 내가 지고 죽었고, 죽음에서 부활했다며, 옥에 갇힌 자들에게 선포하셨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눅16: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라고 하였다.
성경은 죽은 다음에는, 구원받을 기회가 결단코 없다 했다. 옥에 있는 영들은 누구인가?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복음을 전하고 있는 동안, 복음에 순종하지 않고, 죽었던 무리를 말한다.
2. 주님 안에 들어온 자는 구원받는다(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노아는 홍수 속에서,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창6장)을 보자. 방주 안에 들어가니, 구원받았다. ‘방주’(테바)는 예수님의 예표요, 그림자이다. 실체는 예수님이다. 노아의 홍수 때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1) 방주는 하나님의 아이디어다(창6:14上).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노아가 방주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했다. 방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이디어다.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하나님은 방주 안에 들어가게 했고, 문을 닫았기에, 밖에서는 아무리 폭우가 내려도, 방주 속은 안전했다. 홍수가 넘쳐도 방주 안에는 안전했다. 주님 안에 있는 자는 안전하다. 지옥 심판이 있어도, 주님 안에 있으면, 해칠 수 없다. 방주는 하나님의 보물을 담아두는, 하나님의 금고다.
(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구원받도록 하셨다(창6:14下).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방주를 만들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고 하였다. ‘역청’(코페르, 몸값, 속전)을 칠하라고 했다. 카파르(덮다, 용서하다, 화해하다, 속죄하다)에서 파생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오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어야 한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게 만든다. 그래서 신자를 미혹한다. 이단이 왜 위험한가? 사신 주님을 부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단은 교주를 신격화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이, 시대마다 구원자가 다르다는 말이다.
노아 시대에는 노아, 모세 시대에는 모세, 예수님 시대에는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듯이, 말세에는 그 시대의 구원자가 따로 존재한다는 교리가 이단사상이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3) 말씀을 믿고, 방주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돈을 내야만, 방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았다. 얼굴이 예뻐야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기 위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믿고 들어가면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나온 자가, 들어간다.
하나님이 방주를 준비해 주셨기에, 구원해 주심을 믿고, 스스로 들어가면 된다. 들어가는 자는 구원받았다는 표다. 물속에서 다 죽었지만, 방주 안에 있던 자들은 살았다. 복음을 들었다고 구원받지 않고, 순종하여 들어가야 구원받는다. 침례는 주 예수님과 내가 연합되었다는 믿음의 표현이요, 경험이다.
(롬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3. 구원의 표 침례(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베드로는 노아의 홍수를 통해, 신령한 구원의 표(모형)인, 침례에 대하여 설명한다. 노아의 홍수는 침례의 모형이었다. 침례는 그리스도와 연합에 대한, 외적 증거요, 확인이다. 주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아름답게 살겠다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다. 침례는 더러운 것을 제거함이 아니다.
천주교와 어떤 교회들은, 침례를 세례라고 말한다. 그런데 ‘세례’(ㅎ란티스모스)는, 머리에 물 몇 방울 떨어뜨리는 행위이며, 죄를 씻는다는 의미다. 죄를 씻는 개념이 세례인데, 이란 ‘미트라’ 종교에서 유래했다. 조로아스터교로 흘러갔고, 인도로 흘러 들어가, 나중에 천주교회의 세례가 된다.
그러나 ‘침례’(밮티스마)는, 물속에, 몸이 완전히 잠긴다는 뜻이다. ‘밮티조 ‘담근다’의 뜻이다. (밮토) ‘염색한다’에서 왔다. 침례와 세례가 같다고 말하지만, 너무 다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면, 예수님께서도 죄가 있다는 말이 된다. 만일 예수님께서 죄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이단이다.
예수님은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고,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어린양’은 제사할 때, 필요한 제물이다. 죄인의 죄를 짊어지게 하여, 그 양을 죽는 양이, 어린 양이다. 요한은 예수님이 그 제물이라 선포했다.
이렇게 제물이 되기 위해, 예수님은 침례를 받았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공식적으로 제물이 되었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심으로,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의 사역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우리 죄는, 그냥 용서받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대신 죽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침례를 받아,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이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어, 우리 죄가 해결되었다. 예수님은 부활했다. 주님과 연합된 우리는, 주님과 함께 부활하게 되었다. 침례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물속에 잠길 때, 예수님과 함께 죽고, 물속에서 올라올 때, 예수님과 연합되었기에, 부활함을 말한다.
그러니 침례가, 얼마나 복음을 잘 말하며, 복음을 확실히 몸으로 경험하게 만들다. 주님께 쓰임 받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다. 지식이나 능력도 아니다. 주님과 함께, 죽고 사는 경험이다. 침례식은 엄격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요 부활 의식이다.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함께 죽었다가, 함께 부활한다는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침례가 얼마나 복음을 잘 표현한 예식인가? 성경은 침례만 가르치고, 예수님도 침례를 받았다. 초대교회도 침례만을 행했는데, 사도들이 죽자, 진리가 흐려졌다.
침례를 세례로 바꾸게 된 계기는, 침례를 받아야만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교리가 나타났다. 구원의 필수조건이 되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이를 위해, 유아 세례를 만들었다. 지금도 로마 가톨릭은, 영세가 원죄를 없앤다고 가르치고, 모든 축복의 통로라고 가르친다.
1311년 라벤나 회의에서, 로마교회 대표들은 세례만 하고, 침례를 주면 사형하기로 결의하고, 박해를 가했다. 그 후부터 세례만 실시되었다. 16C에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성경의 교훈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있었지만, 그들을 도와주는 영주들이, 세례받았기 때문에, 인간적인 이유로 세례를 계속 베풀었다.
칼빈도 성경에 침례가 맞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세례를 계속했고, 아직도 세례를 하는 교회가 많다. (막16:16)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고 침례를 받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죄를 회개했다면, 신앙을 침례로 표현하라는 말이다.
침례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외치자, 자기 죄를 자백하고, 순종하는 자세로 침례를 받았다(막1:4-5). 따라서 침례는 전에는 내가 죄인이지만, 이제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알리는, 선언이다. 침례를 받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는, 구원받을 수 없다.
예수님이 네가 나를 구원자로 여겼으니, 십자가에서 내려가, 침례받고 다시 올라오자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죄를 분명히 회개하는 신앙이 없다면, 침례받을 수 없다. 갓 태어난 아이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다. 따라서 침례교는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유아 세례를 인정한다는 말은, 세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기 때문이다. 침례가 구원과 연결된다면, 더욱 침례를 받아야만 한다. 세례와 침례는 의미가 다르고, 성경에는 침례만 행했고,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셨을 때,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마3:16-17)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구속을 위해,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다.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있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인간과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벧전3: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니라” 침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주님께 복종한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모습인가? 영광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함을 믿고, 고난을 이겨나가자.
침례는 신비롭다. 죽고 사는 경험이 확실하다. 침례식을 통해, 병든 자들이 치료받는 경우가 많다. 시베리아의 불꽃에는, 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들어가서, 침례식을 행해도 감기도 들지 않는다. 침례가 중요하기에 초대교회는 생명을 걸었다. 그냥 믿기만 하면 되지, 생명의 위험에도 침례를 받았다.
베드로전서는 고난받는 자에게, 위로하는 책이다. 나와 함께 하시며, 지키시고, 선한 길로 이끄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자. 침례를 통해 주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위로함을 느껴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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