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40407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눅24:13-27) | |
작성자 : 윤성은 | 작성일 : 2024-04-13 |
첨부파일: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주일).hwp(95K) |
(13-27)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경험해야, 굳건한 믿음이 될 수 있다. 어떤 분은 대학교 때, 선교회 간사로 열심히 일했고,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리고, 좋은 조건도 다 포기하고, 주님의 도구로 온전히 쓰임 받기 원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께 다 드렸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책임지셔야 하는데, 그런데 삶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없어졌다. 본문에도 이런 고민을 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 나머지 한 사람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다.
이 두 제자는,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평소에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였다. 그러므로 밝혀지지 않은 제자가, 바로 나라고 생각하고 성경을 읽어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해, 확신이 없이 살아가는 자기 모습을 볼 수 있다. 부활의 소식을 들어도, 아무 감격이 없다는 점이, 너무 안타까웠다.
무감각한 심령이 되어서 “또 부활절이야”하는 식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전혀 관심이 없다.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한다고 하는데, 왜 부활의 감격이 없을까? 진정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축원한다.
1. 부활을 믿지 못하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1) 영적으로 어두워진다(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갈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과 동행하셨지만,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한 이유는, ①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가리어져서’(수동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무엇에 의해 가려졌다.
② 그들의 생각대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막16: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라고 말씀했다. 내 생각의 틀을 가지고, 주님을 보면, 올바로 볼 수 없다.
(2)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슬픔에 잠기게 된다(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 슬픔에 빠지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니, 슬픔이 가득하게 되고, 결국 눈이 어두워져서,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몰라보았다. 무덤을 방문해 슬픔에 울고 있던 마리아도 (요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두려움에 빠져도, 주님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마14: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그렇기에 성경은, 걱정 근심을 주님께 맡기라고 한다. 마음 깊은 곳에, 슬픔이 차면, 실망이 가득하게 되어,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따라서 내 마음에, 떠나지 않는 슬픔과 걱정이 있고, 내 생각대로 보고 있다면, 영적으로 어두워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하여, 인생을 밝게 보기를 바란다. 주님은 우리 죄와 저주를, 다 짊어지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볼 때, 플러스(+) 인생으로 보라.
(3) 실망의 상태에 있게 된다(19中-21上).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하실 분으로 기대하였다. 민족 해방을 기대했기에 예수님을 따랐었다. 그런데 돌아가셨으니, 실망과 절망을 경험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믿는데 왜 실망과 절망감이 나타날까요?
내 꿈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실망하게 된다. 실망에 잠겨있다면, 주님의 꿈인지, 내 꿈인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4) 불신앙의 상태에 있게 된다(22-24).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이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일 만한, 믿음이 없었다. 불신앙의 상태에 있었다.
2. 왜 그들은, 불신앙의 사람이 되었나?
(1)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쫓아다녔다(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런데 예수님이 그 뜻을 이루어 주시기 전에,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 돌아가셨다. 자신들의 소원을 성취하지 못하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주님은 이 땅 위에, 나라를 세우심이 아닌데 알지 못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주님의 뜻을 알지 못했기에 실망했고, 슬픔에 잠겼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기보다, 주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하시려는지, 계획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려고 함은 교만이다. 모세는 주님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려고 했을 때 실패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자신을 통해 하실 일을, 알고 순종할 때, 구원의 역사를 이루었다.
예수님을 믿다가 실망했나요? 제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에, 실망하는 것은 아닌가?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에, 조금 어려움이 찾아와도,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 하나님은 없다면서, 실망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2)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25-26).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은 후에, 사흘 만에 부활하시겠다고 말씀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믿지 못했기에 실망하였다. 의심의 마음을 가지면,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지 못하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약속을 믿으면, 어려움 중에서도 실망하지 않는다.
(3) 생활 속에 동행하는 주님을 깨닫지 못했다(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 즉, 우리의 삶 속에서 하면서, 말씀하시며,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신다.
(4)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다(22-23).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체험하지 못해서, 어깨가 축 늘어져서, 깊은 슬픔에 잠긴 채, 엠마오로 걸어가고 있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이다. 알아감은 머리로 앎이 아니라, 삶의 체험으로 알아가야 하기에, (시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하였다.
3. 부활하신 주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1)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다(15中).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17上)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먼저 하나님이 실망한 자들을 찾아와 주셨다. 이것이 복음이며 희망이다. 언제나 나를 먼저 찾아와 주시는 주님이시다. 세상이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셨다. 주님은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시지만,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는가?
(2)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27).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성경 말씀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주님은 제자들을 깨우치려 하실 때,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말씀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이것이 참된 부흥의 모습이다. 우리는 말씀을 깨닫게 되면 회개하며, 주님의 사랑을 맛보고 울게 된다.
그러면 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가?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어도 잘못 읽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건강, 돈, 명예를 얻음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성경 속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알고 믿을 때, 우리는 영생을 얻는다.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3) 마음을 열어주셨다(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성령님이 열어주실 수 있도록, 기대하며, 믿고 기도하기를 바란다.
결론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1) 눈이 밝아졌다(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눈이 밝아지자,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영의 눈이 열려야 한다. 그래서 주님을 주님으로 볼 수 있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
(2) 마음이 뜨거워졌다(32中).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말씀에 감동하여, 감격하는 자가 되었다. 속죄의 감격으로, 다시 뜨거워졌다. 성령의 임하심으로, 뜨거워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뜨거워지기를 바란다. 주님의 사명으로 뜨거워지기를 바란다.
(3) 영적 회복이 일어나게 되었다(52-53).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기쁨이 회복되었다. 예배가 살아났다. 소명이 회복되었다. 교제가 회복되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실의와 좌절에 빠져,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 길이요, 정욕과 낙망과 불신앙의 길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두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신앙의 길이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요, 소망의 길이다.
그렇게 그립던 고향 집을 가까이 두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올라가는 길은 어려운 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순교의 길이지만, 그들은 그 길로 갔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마음이 뜨거워졌고, 영의 눈이 열렸는데, 아직도 근심과 걱정 속에, 사로잡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달려가서,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우리도 예수님을 만났다고 증언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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