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2. 05. 15. 완전하신 스승 그리스도(고전11:1) | |
작성자 : 윤관 | 작성일 : 2022-05-18 |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오늘의 내가 되기까지, 수많은 스승들의 수고가 있었음을 믿고, 감사하기를 바란다. 오늘의 내가 되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준 선생님은 누구신가?
위대한 인물 뒤에는, 훌륭한 선생님이 있다. 볼 수도 없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 못하면서도, 몸이 성한 수재도, 입학하기 어려운 명문,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 학위를 받은 위대한 ‘헬렌 켈러’가 될 수 있던 것은, ‘앤 설리번’이라는 위대한 스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다. ‘본받는 자’(미메테스)는, (미메오마이) ‘흉내 내다, 모방하다.’에서 파생했기에, ‘본받으라.’는 ‘흉내 내는 자가 되라’는 말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흉내 내듯, 너희는 나를 흉내를 내라는 것이다.
성도들은 예수님을, 흉내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 생각, 성품, 예수님의 가르침, 고난, 인내, 겸손, 이 모든 것들을 흉내 내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분쟁과 갈등이 있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우상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 이었다.
성경은 우상의 제물인줄 알고, 먹으라고 한 적은 없다. 문제는 우상의 제물을 빼돌려 시장에, 내다가 판 사람들이 있었다. 초대 받고 다른 집에 갔는데, 우상의 제물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양심을 위해 묻지 않고, 먹으라고 했을 뿐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먹는 데에는 원칙이 있었다.
(10:23-24)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그러면서 사도 바울 자신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으나, 남이 나 때문에 실족한다면 안 먹겠다, 남의 유익을 구하겠다 했다.
그래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리고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다. 내 유익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라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교회의 교사나, 설교자가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 실천하여 본이 되는 사람으로 소개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자기 안에 있고, 예수님이 자신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없지만, 바울과는 수개월 동안 같이 살았다. 따라서 바울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완전한 스승, 절대적인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이니, 스승의 주일에, 스승이신 예수님께, 무엇을 배워야 할까?
1.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 스승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 하나님이다. 그런데 이 땅에,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오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완벽한 참 하나님, 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에, 당연한 권리와 특권을 가질 수 있는데, 그런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이 땅에 오시어, 우리를 구원했다. 예수님의 소원은 하나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형상을 회복해서, 하나님과 온전히 교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한 스승이요, 모델로 오셨다.
사람은 함께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것을 ‘모델’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하여, 스스로 변해 감 모델링이라 한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모델이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모델이고,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모델이다. 또 바울은 디모데에게 모델이 되었다.
이처럼 훌륭한 사람 주변에는, 훌륭한 모델이 있는데, 이를 스승이라고 한다. 그래서 누구를 모델링하느냐? 누구를 스승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다. 자신도 모르게, 그를 관찰하고 배우기에, 모델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이, 나온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은,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고, 좋은 사람의 영향을 받아야 한다. (잠언22:24-25)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의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
나와 동행하는 자, 나와 함께 하는 자는, 나도 모르게 닮아가기에, 누구를 본받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인생의 문제다. 그러기에 완벽한 스승, 예수 그리스도만을 본받아야 한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모델이다. 예수님을 배우면, 나도 모르게 닮게 되고, 또 자신도 모르게 남들이, 나를 배우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사도바울은, 정말 담대한 분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어디서 이런 당당함이 나왔겠는가? 내가 예수를 본받고 있으니,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다. 개인적인 교만이 아니라, 믿음의 담대함이다.
따라서 저도 여러분에게, 당당하게 말하겠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저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드렸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제 목숨을 드렸다. 그러기에 여러분도 저를 따라, 목숨을 걸고, 주님을 섬기기를 축원한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완벽한 스승이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놀랍게 변화되었다.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을 만난 후, 위대한 사도로 변했다. 평생 매국노라 욕을 먹으면 살아야 했던 마태가, 예수님을 만난 후, 위대한 사도가 되어, 마태복음을 기록한 위인이 되었다.
기독교를 무섭게 박해하던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한번 만나고, 위대한 전도자로 변화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능력의 스승이다. 그러기에 우리도 예수님을 만난 성도라면, 예수님의 좋은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우리의 영원한 스승으로 존재하고 계신다.
2. 예수님의 무엇을 본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예수님께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는, 주님의 사역 모습을 살펴보면서 그분의 성품을, 몇 가지 배우기를 바란다.
(1) 주님의 겸손을 배워야 한다(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도 전인 480년경,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했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할 것을 예언했다.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다. 예수님도 자신의 겸손을, 배우라 하셨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때어나실 때, 베들레헴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고, 베들레헴 외양간 구유에서 태어나셨다. 전능자 하나님이, 하늘보좌를 내려놓고, 이 땅에 오신 것도 황공한데, 아무도 환영해 주지 않는 외진 구유에서 태어나셨다. 또 갈릴리 나사렛, 촌 동네에서 자라셨다.
갈릴리 어부들과, 무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여, 복음을 전했다. 주님의 사역은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아들로 대접을 받거나, 높아지려는 모습이 없었다. 무능해서도 아니요, 자격이 없어서도 아니다. 이것이 겸손이다. 겸손의 능력이다. 우리도 우리의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시기를 바란다.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이 예수님이, 겸손의 왕인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도 주님처럼, 겸손하기를 축원한다.
(2) 주님의 인내를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으나, 아무도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30년을 인내하다가, 공생애를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험했다. 심지어 사단도 시험했다. 그래도 예수님은, 분노하지 않고 인내했다. 특히 하나님을 섬긴다는, 종교지도자들의 무례에 대해서도 인내했다. 십자가를 지기 전날 밤에, 군병들은 예수님을 놓고 장난쳤다.
그 모독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얼굴에 침을 뱉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리고, 주먹으로 머리를 쳤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혀서 “유인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하며 조롱했다. 그런데도 인내하셨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그들을 심판하실 수 있다.
그런데 왜 참으셨다. 그 십자가의 형벌은, 우리의 죄 때문이기에,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인내로, 그 참으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았고, 그 인내로 내가 여기까지 왔다. 그 인내를 배우시기를 축원한다.
(3) 주님의 용서를 배워야 한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 주님이 법대로 했다면, 우리는 벌써 지옥에 갔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은, 주님의 용서 때문이다. 주님의 위대한 능력은 용서다.
이 용서 때문에,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보아도, 이해가 안 되는 죄도,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하신다. 다윗의 죄가 용서받을 죄인가? 우리 주님은 믿는 자라는 이유 하나로, 그리고 회개했다는 이유로, 용서하고 넘어가신다.
(사1:18中)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문제는 그처럼 우리도, 용서하라는 것이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몇 번 용서를 받았을까? 우리 자식은, 몇 번 용서했는가?
그런데 우리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숫자를 알 수 없을 만큼, 용서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은, 용서를 못하는가? 주님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그것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것임을 왜 모르는가?
(마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무슨 말인가? 용서를 못하면, 나도 용서를 못 받는다는 것이다. 건강하지 않으면 하지 못하는 것이 3가지가 있다고 한다.
① 자연을 보고, 웃지 못한다고 한다. ② 콧노래를 부르지 못한다고 한다. ③ 유머를 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유머를 들어도, 웃지 못한다. 그런데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3가지를 못한다. ① 기도가 안 나온다. ② 예배드리기 싫어한다. ③ 기쁨이 없다. 그래서 찬송하기 싫다. 그러면 영적으로 침체된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가? 가슴속에 용서를 못한, 분노가 있다. 시기 질투가 가득하고, 교만이 가득하다. 그러니 남들이 꼴 보기 싫고 밉다. 그러니 자신은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용서하고, 주님의 겸손으로, 그를 사랑하고 품으면, 내가 자유를 얻는다.
용서가 안 되는데, 어떻게 용서하는가? 그렇기에 주님의 용서를 배워야 한다. 만약에 내가 용서를 못하겠다면, 하나님도 나를, 용서하지 않을 수 있다. (막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4) 주님의 영혼구원의 열정을 배워야 한다.
주님은 이 땅에 영혼을 구하러 오셨기에, 영혼구원 사역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정말 잠시도, 쉴 겨를이 없었다.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막3:20).
(막1:38)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내가 이를 위해 왔노라 하셨다. ‘영혼구원의 열심’이, 우리 주님에게 있었다. 심지어 부활하신 후, 승천하면서 남긴, 유언적인 메시지도 영혼 구원이다. 너희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 하셨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하셨다. 따라서 우리에게, 영혼구원의 열정이 있기를 축원한다. 왜 주님이 교회를 세우셨고, 왜 교회에 우리를, 먼저 불러주셨나? 우리끼리 잘 먹고 행복하라고 모아준 것이 결코 아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영혼구원에 있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다.
주님의 열정을, 배워야 한다.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하셨다. 주님은 한 번도,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유익을 구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진정 우리가 닮아야 할 대상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예수님은 우리의 완벽한 스승이며, 최고의 스승이다. 그분께 감사하며 닮아가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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