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내용
•홈  >  말씀과찬양  >  설교내용
  제  목 : 2020년 10월 11일 설교 - 절망 중에서도 소망(행27:20-26)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21-09-08

절망 중에서도 소망(27:20-26)

 

(20-26)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

절망이제 바라볼 것이 없고, 모든 희망이 다 끊어진 상태를 말한다. (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라고 말했다. 캄캄한 밤에, 큰 풍랑으로, 구원의 여망’(엘피스, 소망)마저 없어졌다. 한 마디로, 절망 중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보름 동안,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배는 표류했다. 바다는 언제, 어떻게 변화될지, 아무도 모른다.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은, 항상 순조로운 항해를 기대하지만, 순조로운 항해만,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바울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소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1. 풍랑을 만나고, 절망한 이유?

상식을 무시했기 때문이다(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바울은 백부장에게, 이번 항해가 위험하다고 권했다. 바람의 흐름의 때를 알고, 상황을 바르게, 파악했다. 지중해는 9월 중순에서 3월까지는, 돌풍 부는 때가 많았기에, 항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특히 11월 중순부터 1월까지는, 항해가 거의 불가능하여, 지중해를 항해하는 배는, 거의 없었다.

금식하는 절기(유대력 710)였다. 3개월을 더하면, 우리 달력이 된다. 이미 지났다고 했으니, 10월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지금 항해하기에, 위험한 계절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타당한 이유가 있으니, 항해를 중단하고, 겨울을 지난 후에, 다시 항해하기를 권했다.

바울은 항해에서, 3번 파선당한 경험이 있었다(고후11:25). 상식과 경험을 무시하면, 후회하게 된. (10-11)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죄수의 말보다, 선주와 선장이라는 외형적인 조건을, 더 중요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선장과 선주라는 외형적인 직책이, 백부장에게는, 더 크게 보였던 것이다. 멋진 비주얼과, 연출된 쇼를 믿으면, 곤란을 경험하게 된다. 외형적인 명함이, 꼭 실력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의 말은, 그때는 옳다고 보일 수 있지만, 지나고 나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또 사람들은 자기 이익 앞에,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을 잃어버리기 쉽다. 배가 정박되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손해가 크다. 그래서 욕심이, 상식을 무시하게, 만들 수 있다.

바른 판단보다, 다수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이다(12).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떠나자고 했다. 항구가 작으니, 지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조그마한 불편을 참지 못해서, 좀 더 편한 곳을 찾아 나선 그들은, 극도로 불편한 상황, 즉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게 된다. 이때 많은 사람의 의견에 따라서, 뵈닉스로 이동한다.

백부장은 바울의 바른 판단보다, 배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따랐다. 우리는 다수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다수의 의견이라고,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갔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많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다수의 의견을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하였다. 교회는 다수의 의견에, 항상 귀를 기울려야 하지만,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 잘못된 선택은, 멸망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처음에 일이 잘 된다고, 결과가 좋을 것이라고, 확신하면 안 된다(13-14).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었을 때, 남풍이 순하게 불었다. 그들의 결정이 옳았다고, 처음에는 의기양양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라굴로’(지중해의 강한 동풍)를 만났다. 처음에 어떤 일이, 자기 뜻대로 잘 풀린다고, 하나님의 뜻처럼, 착각하면 안 된다.

처음에는, 내 뜻대로 잘되는 것 같지만, 마지막에 무너지는 경우가, 세상에는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 뜻대로 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느냐가 중요하다.

2. 절망에 처한 자들의 모습(15-16).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바다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갑자기 불어오는, 광풍에 휩쓸려, 인생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갑작스러운 광풍을 만난 배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힘들었던 상황을, 설명해 준다.

배가 밀려’ -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치 어떤 괴물에 의해 붙잡혀 끌려가는듯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그들이 탄 배는, 그야말로 광풍에 의해, 길을 잃고,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쫓겨 가다가’ - 계속해서 배가, 광풍에 의해서, 떠밀려가는 광경이다. 선장과 선원들의 수고에도, 배는 점점 넓은 바다로, 떠내려갔다. 배는 광풍에 떠밀려, 엉뚱한 가우다로 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가우다 섬 아래쪽으로 밀려왔기에, 북쪽에서 불어오는 광풍을, 어느 정도 차단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배에 탄 사람들은, 그 틈을 이용하여, 간신히 거루를 잡았다. ‘거루는 큰 배 옆에, 가지고 다니는, 작은 배, 구명정을 뜻한다. 태풍을 만날 경우에는, 갑판 위로 끌어올려야만 하는데, 표류하는 동안에는, 끌어올릴 여유가 없었다.

거룻배는, 배가 파선되었을 경우나, 항구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곳에, 비상 상륙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다. 광풍으로, 배가 정신없이 떠밀리는 동안, 이 구명정에는, 물이 가득 들어왔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간신히, 거루를 갑판으로, 끌어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짐을 바다에 버렸다(17-19).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거루를 끌어 올려, 파손을 막기 위해, 단단히 조여 맸다. ‘스르디스, 해안의 모래바닥을 말한다. 광풍과, 모래 수렁에 걸리지 않게, ‘연장즉 닻을 내렸다. 풍랑으로 배의 난파를 막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애쓰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렸다.

절망하기까지, 그들은 노력을 했지만, 모두 다 헛것이었다. 먼저 그들은, 풍랑 앞에서, 짐을 바다에 버렸다. 짐을 버리면, 배의 복원력이 강화되어서, 풍랑 속에서도, 전복될 위험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용이 없자, 항해에 필요한, 배의 기구들까지 버렸다.

풍랑이 심해지자, 살기 위해, 세상 짐을, 바다에 풀어버렸다. 이 배는 무역선이었기에, 짐들을 놓지 않으려고, 무수히 애쓰고 수고했지만, 그들에게 이익과 만족을 가져다 줄, 짐들을 모두 버렸다. 또한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버렸다. 더 이상 그들 힘으로, 배를 운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선원들은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해보고, 버릴 수 있는 것은, 다 버렸지만, 풍랑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절망스런 문제를 해야 할까요? 주님에게 답이 있다.

3. 절망 중의 소망(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바울은 이때, 절망 중에 있었던, 배에 타고 있던 승객들을, 안심시킨다. 어떻게 안심시켰는가?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상황은 절망적이지만, 바울은 희망적인, 말을 했다.

이들에게 가장 큰 적은, 무서운 광풍도, 모래수렁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적은,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는, 절망이었다. 바울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이제는 안심하라고 했다. 너무 적절한 위로요, 격려의 말이었다. 그러면 바울은, 용기를 줄 수 있는, 위로의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절망 가운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했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그의 사자를 통해, 바울과 함께, 항해하는 자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바울은 더 이상, 절망할 이유가 없었다.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 있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 앞에 엎드기고, 예배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기 바란다.

인생의 사명을, 발견해야 한다(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고난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고난이 있지만, 결국은 가이사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서, 가이사를 만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로마에 가서, 복음의 불을 붙이기, 원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제국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아직도 살아야 할, 삶의 이유를 주신다고 믿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세상에 존재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지 알 때, 고난 중에서도, 살아야 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도 괴롭지만, 무엇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지 모르기에, 그것이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될 때, 넘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명이야말로,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다.

하나님의 사자는, 바울이, 가이사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과,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그에게 맡겼다고 했다.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난파선에서 구원의 소망도 없이, 절망한 사람들을, 돌아보아야 할 책임이 있음을, 바울은 깨달았다.

그 순간 바울은, 자기 목숨을 걱정하는 것은, 사치였다. 이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 그들에게 살 소망을 제시했고, 지도자로 부상한다. 죄인 바울이, 위기의 순간에, 절망한 사람들에게, 살 소망을 제시하면서, 지도자로 부상했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25-26).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내가 올바로 믿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힘이 된다.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을 신뢰했다. 신앙의 깊이는, 위기를 맞았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순탄한 환경에서는, 신앙의 깊이를, 잴 수 없지만, 위가가 닥쳐왔을 때, 비로소 신앙의 깊이는, 드러나게 된다. 절망적인 환경일 때, 하나님을 신뢰해야만 한다.

그러나 믿음이 필요한 상황일 때, 정작 믿음을 갖지 못하는, 성도의 모습을 볼 때가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풍랑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풍랑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했다. (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풍랑을 만나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14:27)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주님이 책임진다는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승리하기 바란다. 하나님은 역사를, 책임지는 분이다.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몸이 아프다고, 낙심하고 있나요? 돈이 없어서, 좌절하고 있나요? 인생 가운데, 풍랑을 만났다고, 힘들다고,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기 바란다. 풍랑과 파도를 만드시고,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내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시는데,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기 때문에, 좌절하는 것이다.

절망 중에, 바울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 바란다. 절망의 광풍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이전글 : 2020년 10월 4일 설교 - 두려워 말라 낙망하지 말라(습3:14-17)
  다음글 : 2020년 10월 18일 설교 - 말씀을 빼앗기지 말자(눅8:4-15)
이전글 다음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