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0년 8월 9일 - 예수님과 연합하는 침례(롬6:3-5)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21-08-10 |
예수님과 연합하는 침례(롬6:3-5)
(롬6:3-5)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
교회에서 침례식을 앞두고, 가끔 ‘부끄럽게 여러 사람들 앞에서, 신앙고백을 하고, 침례를 꼭 받아야 하나요?’라고 말씀하는 분이 있다. 또 ‘나는 교회에 매이고 싶지 않은데, 침례를 받으면, 교회에 매이는 것 아닌가요?’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중요하지, 침례는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우리 중에,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는 분은 없습니까? 만일 이렇게 생각한다면, 내 생각대로 믿는 것이지, 성경대로 믿는, 신앙은 아니다. 오늘 교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점 중의 하나는,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방법에 대해 2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말로 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는 성례를 통해 전하는 것이다. 성례가 중요한 이유는, 복음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례는 성경의 핵심,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침례’는 ‘성찬’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명하신 성례이다. ‘할례’와 ‘유월절’이 구약의 성례라면, ‘침례’와 ‘성찬’은 신약교회의 성례이다.
(고전10:1-4)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복음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그런데 (막16:16)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은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했다.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지 않고,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면서, ‘침례’를 강조했다.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행2:37)하며, 죄를 고백하자, (38上) “베드로는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했다. 회개한 증거는, 침례로 나타나야 한다.
1. 침례가 구원의 조건이 되는가에 대한, 2가지 해석
(1) 세례를 행하는 교회, 천주교와 개신교의 일부, (장로교, 감리교 등)에서는, 세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본다. (막1:4) ‘죄사함을 받게 하는 침례’라고 하였기에, 침례 받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요3:5)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했는데, 물을 침례로 생각해서, 침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고,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침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 되자,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침례를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어린아이, 노인, 병자들에게는, 물속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가 힘들었기에, 3C 교부 씨프리안은, 죄를 씻는 것은, 물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며, 세례를 허용했고, 그 이후 번져나갔다. 침례를 약식으로 바꾼, 이런 생각 배후에는, 구원의 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그 증거가 유아세례다.
천주교회는 침례를, 영세로 바꾸고 ‘영세는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통로요, 중생을 주입하고, 보존하게 만든다.’라고 하며, 미신적 수단으로 바꾸고, 형태도 머리에 물을 붓거나 뿌리는, 이방 종교 형태로 바꾸었다.
(2) 침례를 행하는 교회에서는, 믿는 증거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해석한다. 예수님 곁에, 십자가에 달렸던, 구원받은 강도처럼, 침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개인적인 믿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의미로 보기에, 구원받기 위해서, 반드시 침례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침례교회에서는, 유아세례를 행하지 않는다. 유아세례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무조건적 예정, 불가항력적 은혜를 강조하는, 장로교 교리에도, 또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이, 구원을 결정한다는, 감리교 교리에도 맞지 않는다. 유아세례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종교개혁 정신을 왜곡한 것이다.
침례교인들이,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복음적이고 성경 중심적으로, 침례를 행하자, 자신들이 받은 유아세례를 무시한다고 하여, 가톨릭교도들과 일부 개신교도들에게, 많은 침례교인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만일 침례가 구원의 조건이라면, 더욱 침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이유는 ① 성경에 유아세례에 대한, 기록이 없고, ② 유아들은 너무 어리기에, 죄의 개념을 알지 못하고, 내 죄가 예수님의 보혈로, 속죄 받았다는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구원에 대한 믿음도, 신앙고백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 메시지는 회개다.
침례 요한은 (마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외쳤고, 예수님도 (마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하셨다. 구원은 회개로부터 시작된다. 회개 없는 구원도 없고, 회개 없는 성령의 임재도 없다. 회개는 고통스럽지만, 회개할 때 구원과 축복이 된다.
죄를 짓는 잘못보다, 회개하지 않는 잘못이, 더 크다. 회개한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지 않으면, 온전한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이다. 죄를 깨닫거나, 마음을 바꿨다고 해서, 회개가 아니다. 가슴을 치고, 옷을 찢고, 애통해도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향해, 나아감을 말한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함께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겠다는 의미로, 침례를 받는다. (행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날에 신도의 수가, 3천이나 더하더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가, 그 증표로 침례 받자, 그들을 ‘신도’(프쉬카이, 목숨, 생명)라고 했다. 개역 성경에는 ‘제자’라고 기록했다.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고, 주님과 함께 하겠다는 증거로, 침례를 받자 ‘신도’, ‘제자’라고 불렀다.
2. 침례의 의미는 무엇인가?
침례는 죄악 된 세상과 끊고, 주님과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함께 하겠다는 고백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 새 생명을 얻었음을, 선포하는 의식이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세례와 침례는 같다고 하지만, 원문은 분명히 다르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썼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번역된 성경이다. 번역된 성경은, 원문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좀 더 정확하고, 분명한 뜻을 전하기 위해서, 원문을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원문이, 어떻게 말하고 있느냐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어떻게 다른가?
(1) 세례는 머리에 물을 뿌리지만, 침례는 몸이 물에 완전히 잠기는 형식이다.
‘물을 뿌리다’의 명사는, ‘란티스모스’, 동사는 ‘란티조’다. (히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물에 완전히 잠긴다’는 명사는 ‘밮티스마’, 동사는 ‘밮티조’다. (마3: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푸실 것이요.”
밮티조는 ‘밮토’에서 왔는데, ‘물에 완전히 잠그다, 염색하다’ 옷감을 염색하기 위해, 잠근다는 뜻이다. 한글 성경에 ‘세례’라고 표기한 곳은, 원문에 뿌리는 ‘란티스모스’가 아니라, 모두 ‘밮티스마’다. 따라서 원문을 바르게 번역하면, 분명히 세례가 아니라, 침례라고 해야 한다.
일본어 성경은, 헬라어 ‘밮티스마’를 음역하여 (바프테스마)로, 영어 성경도 음역하여, (밮티즘)이라 기록했다.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셨다. (마3:16)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라고 했다. 물속에 들어가셨기에, 다시 물에서 올라오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례가 아닌, 침례를 받으셨다.
예수님은 ‘세례를 주라’고 하지 않고, ‘침례를 주라’고 하셨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제자가 됐다는 표시로, 침례를 주라고 말씀하셨다. 전통과 형식을, 생명처럼 여기는 유대인들은, 지금도 침례의식을 행한다.
이 의식을 (미크베, 미크바)라고 한다. 이 말은 ‘카바’(함께 묶는다)에서 왔다. 유대인들은 침례를 받을 때, 물이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손가락도 벌리고, 겨드랑이도 벌려, 몸이 완전히 잠겼다가 나온다.
예수님은 침례를 주라고 분부하셨고, 초대교회 성도들도, 완전히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았다. 사도들도 침례를 강조하여, (행1:21-22) 가룟 유다 대신에, 사도를 뽑는 조건으로, 요한에게 침례 받은 자야 했다. 이렇게 침례를 중요하게 여겼다.
(2) 세례(洗禮)는 ‘죄를 씻는다’의 개념이고, 침례(浸禮)는 ‘연합’의 의미다.
세례의 ‘洗’는, ‘씻을 세’이다. ‘죄를 씻어 정결하게 되었음’을 표현하기 위해, 물을 뿌린다. 그러나 침례의 ‘浸’은, ‘잠길 침, 배어든다는 침’이다. 예수님과 연합하고, 교회 공동체와, 연합한다는 뜻이다.
세례는 씻는다는 의미이기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죄를 씻기 원한다는 의미로, 세례를 받는다. 따라서 죄인에게 필요한 의식이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면, 예수님도 죄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 죄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는 이단이다.
(마3:14-15)에,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시자,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당신이 내게로 오시느냐며, 침례를 줄 수 없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요한이 침례를 베풀었다.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했다. ‘어린양’은 제사 드릴 때, 꼭 필요한 제물이다. 구약에는 죄를 짊어진 속죄물을, 어린양이라고 했다. 사람들의 죄를, 어린 양이 짊어지게 하고, 그 양을 죽여, 죄를 용서받았다.
그 희생제물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침례요한은 선포했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셨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죄를 짊어지셨다. 어떻게 주님은 우리 죄를 짊어지셨는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셨다.
죄를 짊어지셨기에, 대속의 어린양이 되셨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침례를 받으심으로, 인간과 연합되어, 모든 죄를 짊어지고, 공적인 사역이 시작되었고, 희생제물이 되어 죽으셨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대속물이 되려고,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셨다.
우리의 죄가 그냥,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 속죄양 되신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이다. 세례라고 말할 때, 죄를 씻어 깨끗하게 했다는 말이 되어서, 죄에 대해 장사했다는 말로, 바꿔 쓸 수는 있지만, 그러나 침례의 1차 의미인, 연합이라는 말은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가 아니라, ‘침례’라고 써야 하고, 그렇게 행해야 한다. (눅7:30)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침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는 순종하여, 주님과 연합되었다는 감격과 기쁨을 누리는, 모든 분이, 되기를 바란다.
3. 침례식을 통해, 주님과 연합됨을 고백하라.
침례는 예수님과의 연합을 말하며, 물속에 잠길 때, 예수님과 함께 죽는 장례이다. 또 물에서 나올 때,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다는 의식이다. 그런데 내가 죽었음을 인정해야 하는데, 죽지 않음이 문제다.
죽은 사람은 반응할 수 없다. 죽은 사람은 화도 안 낸다. 내 자아가 죽으면, 나는 죄에 대해 반응하지 않을 수 있다. 죄의 유혹이 있어도, 반응하지 않게 된다. 이미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도 살아있기에, 유혹에 넘어가고, 죄악에 이끌린다.
왜 자꾸, 악한 것의 유혹을 받고, 죄를 범하게 됩니까? 왜 자꾸 성내고, 화를 내게 됩니까? 그것은 아직도, 내 자아가 죽지 않고, 옛사람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침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는 죽었고, 장사지냈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롬5:20下)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의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 지어도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신천지의 말이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기에,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느냐? 그러니 유다가, 얼마나 좋은 일을 했는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말은, ‘죄를 깨닫게 될수록 은혜가 넘친다’는 의미다.
러시아 로마노프家에, ‘라스푸틴’ 종교보좌관이 있었다. 높은 사람 앞에서는, 죄를 지적하기 어렵다. 그래서 왕이, 죄를 지을 때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며 아부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서는, 계속 반복하여,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잘못 적용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말이다. 그러나 (롬6:1)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고 하였다.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했다. 내 속에 있는 죄성이, 죽은 것이 아니다. 죄는 내 속에서, 여전히 활동한다.
그러기에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깨닫고, 단호히 선포해야 한다. 내 안에, 죄의 유혹이 다가올 때,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선포하기 바란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사람이 되었다. 물속에서 나올 때, 예수님과 함께 부활함을 선포한다. 그러기에 침례는, 놀라운 복음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의의 나라로, 옮김을 받았다. (롬6:3-5)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는 이렇게 침례를 통해, 예수님과 연합되었음을 경험하고, 감격하게 된다. 즉, 침례식은 결혼식과 같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닐 수 있다. 물론, 결혼식을 꼭 해야만 부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혼인신고를 하면, 결혼이 성립된다.
그러나 결혼식을 하지 않아서, 결혼기념 사진 한 장 없다면, 진짜 부부도 의심받을 수 있다. 따라서 결혼예식을 행함으로, 이 사람이 내 남편, 내 아내임을 모두에게 알리듯, 예수님을 믿고 죄를 회개했다면 침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음을, 선포하기 바란다.
침례의 제정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셨다. 부활하신 후에, 복음 전도와 함께 명하심으로, 제정하셨다. 예수님께서도, 몸소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고, 이후에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명에 따라, 침례를 가르치고 또 시행했다. 그러므로 침례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가 의무적으로, 행해야 하는 성례이다.
예수님을 믿고, 내 죄를 분명히 회개했다는, 신앙고백이 없다면, 침례를 받을 수 없다. 성도는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 ‘네가 누구냐?’ 하는 질문 앞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선포해야 한다.
침례는 신비롭다. 이전의 나는 죽고, 새롭게 거듭나는 경험이, 놀랍게 나타난다. 병든 자들이 치료를 받고, 술, 담배에 매여 살던 사람이, 술도, 담배도 끊게 된 간증이 많다. ‘아놀드 로제’의 저서 「시베리아의 불꽃」에는, 감동적인 간증이 있다.
복음을 전하다, 일가족이 시베리아로 이송되어, 수용소에 복역하면서, 소련 지하교회를 이끌었고, 5천여 명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정부의 탄압과 박해 속에, 침례를 행하기 위해, 영하 45도의 극한에도, 두꺼운 얼음을 깨고 들어가서, 침례를 행했다.
심지어 경찰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새벽에 행했지만, 감기에도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가혹한 환경에서도, 침례를 받기 위해, 매일같이 기도했다.‘고 그는 간증했다.
사랑하는 성도님, 지금 내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시며, 그들을 이끄신 하나님이, 곧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저와 모든 성도님들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런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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