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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20년 5월 10일 -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창11:27-32)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20-05-10
  첨부파일:   어떠한 삶을 선택할 것인가.hwp(24K)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11:27-32)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의 역사다.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오셔서, 부르시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다. 성경은 생명과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한, 역사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선택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권, 곧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에 의한 것이며, 이 부르심에 순종한, 아브라함의 신앙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사람을 택하시고 부르실 때, 먼저 세상으로부터 분리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신다.

세상으로부터의 분리,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워지는, 전제 조건이 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우상숭배, 세상 방식의 삶, 인간 중심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곧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다.

하나님은 죄에 빠져 있는, 인생을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세 사람, 데라, ,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모습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깊이 깨닫기 바란다.

1. 데라(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가나안 땅으로 가기 원했던 사람은, 아브람이 아니라, 바로 데라였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시기 전에, 먼저 데라에게 소원을 주시고, 가나안 땅으로 부르셨다. 데라는 자녀와 자손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지만, 하란에 도착하여, 거기 거류했다. 머물며 살았습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히브리어로 테라흐인데, 그 이름의 뜻은 ‘(여행 시의) 휴식, 미루다.’이다.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음성을 들었지만 미뤘다. 데라의 소원과 목적지는, 가나안으로 가는 것이었지만, 그 계획을 미루고, 하란에 머물러 살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데라의 인생을 보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출발했지만, 도중에 머물러 버리는 자들이 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앞으로 나아갈 길은, 험난해 보이고, 현재의 삶은 편하고, 좋아 보이니까, 머무는 것이다. 데라는 우르에서, 우상을 섬겼는데, 하란도 우상을 섬기는 곳이기에, 적응하여 살기가 편했다.

그러나 우리가 편안하다’, ‘안전하다하는 곳이, 위험의 곳임을 알아야 한다. 갈대아는 우상숭배가 만연한 곳이다. 하란은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상업도시로, 중요한 행정수도였다. 병역세 면제와, 부역도 없는, 특권이 있었다. 또 그곳은, 달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땅이었다. 이들은 왜 하란에 머물렀나?

하란은 모든 것이 풍족했고, 세상 향락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32)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향락에 물들어, 하나님이 소망을 주신,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그 땅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향락의 도시에 머물러, 거기서 죽었다. 이 세상과 하나님을 바꿨다.

바울과 함께 사역했던 데마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 대해서 (딤후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데마는 바울과 함께 믿음으로 출발했지만,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가버렸다고 말씀한다.

그래서 (요일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기에, 이 세상에 주저앉거나, 세상 향락에 빠져 버리기 쉽다. 따라서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가? 우리 가정과 사회, 내 나라와 민족을 주님께로 인도하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그렇게 세상 가운데서 구별되어, 모인 자들이, 교회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자야! 죄악 된 세상에서, 나오너라!’고 부르신다. 특별히 출애굽의 역사는, 내 백성 이스라엘이, 그 땅(애굽)에서 나오라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악의 땅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오기 바란다.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다가, 중단한 일이 있습니까?

나는 중단하더라도, 하나님은 결코 멈추지 않으심을 믿으십니까?

나와 내 가족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받으시길 원하십니까?

2. (12:4-5).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 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의 의미는 가리다, 단단히 덮어 싸다.’에서 나온, “덮개, 베일을 말한다. 그는 아브람을 따라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롯의 신앙은 아브람을 따라가는 신앙이었다. 가나안에도 아브람과 함께 갔고,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에도, 롯은 아브람과 함께 갔다.

이처럼 아브람과 함께 할 때는, 롯은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었다. 롯을 보면, 우리가 믿음 생활을 잘 하려면, 참 믿음의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우리는, 참 믿음의 사람과 함께 할 때, 연약한 내 믿음을 지킬 수 있고, 믿음생활을 더 잘 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사람을 바라보면 안 된다.

그가 바라보는, 하나님을 보고 따라가야 한다. 오직 주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만 한다. 롯은 하나님의 약속인, 말씀을 통해, 볼 줄 몰랐다. 롯은 가나안 땅에 이르렀으나, 오직 자신만 아는 사람이었다. 롯은 눈을 들어, 요단지역을, 열망의 눈으로 보았다(나사).

(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이는 롯의 관점을 보여준다. 그는 눈을 들어, 소돔과 고모라를 열망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나사).

롯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지 않았다. 그래서 양보할 줄 몰랐고, 안목의 정욕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롯은 아브람의 조카로, 하란을 떠난 후에, 아브람의 보살핌으로 성장했다. 아브람은 롯의 후견인이요, 보호자가 되어, 지금까지 자신을 돌봐주었다.

그런데 이제 노인이 된 아브라함에게, 여호와의 동산 같은 아름답게 보이는 땅, 물이 넉넉한 그 땅을 돌리지 못하고, 이기적인 선택했다. 롯은 세속적이고, 물질 중심적인, 애굽의 정신만 가득했다. 그러나 (13: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비록 롯의 몸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와 있지만, 세상을 바라보았다. 세속적 부요와 향락에 이끌려, 아브람을 떠나 죄악의 도성, 소돔으로 갔다.

처음에는 보기만 하다가, 마침내 세상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롯은 세상의 명예와 물질에 눈이 어두워져, 믿음을 떠나, 죄악 된 세계로 빠져드는, 불행한 인간이 되었다. 이런 불신앙적 선택은, 비참한 결과들을 가져왔다. 신앙을 잃었기에,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전쟁 포로가 되고, 재물을 빼앗긴다(14:12). 이는 경고였다.

죄악의 도시 소돔이 몰락할 때,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다(19:25).

아내와 사위, 가족을 잃어버렸다(19:14, 26).

딸과 불륜의 관계를 맺어, 영원한 원수를 낳은, 역사에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남겼다(19:30-38).

소돔향락으로 불태우는이라는 뜻으로, 죄로 불태우는 도시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 향락으로,/ 죄악으로 불태우자, 소돔을, 불로서 태우는 심판을 하셨다.

(19: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여기서 상관한다.’, 동성애를 뜻한다. 벌써 그 당시에, 동성애가 있었다. 소돔에서 나온 영어 (Sodomite) ‘남색 하는 자, (Sodomy)남색이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죄를 지었다. 신앙을 저버린 행동이었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 받기 직전에, 천사들이 목격하였던 것이 동성애였다. 멸망의 징조로 나타난 죄악이, ‘동성애이므로, 그 죄악을 버리지 않으면, 곧 죽으리라는 말씀이나 마찬가지다.

(19:7-8)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이는 분명히 세상적인 타협이다. 그는 차라리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신앙으로 담대하게, 거절해야만 했다. 그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신앙,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 (19:9)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하는 도다

소돔 사람들은, 롯을 존경하는 마음이 없었고, 오히려 법관이 되려고 한다며, 꾸짖었다. (19:14)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19:15-16)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롯은 머뭇거렸다. 지체했다. 지금의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 심판과 멸망의 순간이다. 그런데도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습이다.

(32-33)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그 밤에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우리도 깨어있지 않으면, 넘어지고 타락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성령에 충만하지 못할 때,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

3. 아브라함(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어디로 가는 줄도 몰랐지만, 무조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완성된 자로 선택되고,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여러 면에서 부족한, 평범한 인물로,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고(12:13),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도, 기다리지 못하고, 아내의 몸종을 통해, 아들을 얻은 사람이다(20:2). 기근을 피해 애굽에 가서, 몸종 하갈을 얻었고, 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다.

오늘까지 이스마엘의 후손은, 이스라엘을 괴롭힌다. 한 번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만든다. 따라서 죄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주시고, 복을 주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까?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살았다(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기에, 복을 받고, 롯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아브람을 따라, 살았기에 실패했다.

사람을 따라가면 실패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아브람이 하나님 말씀을 따라 갔지만, 그 땅에도 기근이 있었다. 그래서 아브람도 역시,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우리가 주님을 믿어도, 기근이 올 수 있다.

그러나 그 기근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기근을 허락하신 이유는, 그 기근을 통해,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 이것이 신앙 훈련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기근이 올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인내하며 기도해야 한다. 결코 죄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2) 하나님을 믿었다(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그것을 의로 여기신다. 아브람은 많은 실패를 했지만, 하나님을 붙들었고 믿었다.

목사님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제일 기죽는다고 한다. ‘한경직 목사님과 같은 분이 되십시오이런 말을 들으면, 나에게 그런 인품과 영성이 없기에, 기가 죽고, 더욱 더 어려운 말은, ‘주기철 목사님처럼 되십시오.’ 그러면 못 박힌 널판지 위를 맨발로 걸어갈, 순교자의 용기가 없어서 기가 죽고,

손양원 목사님처럼 되십시오그러면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는, 용서와 사랑이 내게는 없어 기가 죽는다. 과연 나도 저들처럼, 살 수가 있을까? 그러나 나 혼자서라면 기죽고 낙심할 수밖에 없지만, 하지만 주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를 붙들어주실 줄 믿는다.

(3) 온전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다(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의 일생을 통해,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신앙훈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22장에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친다. 내 생명보다도 소중한, 나에게 있는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는 그 순종의 믿음을 기쁘게 받으셨다.

사도 바울은, 고전 2-3장에서, 3종류의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세상의 쾌락, 향락만을 추구하며,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으로, ‘육에 속한 사람’(퓌시코스), ‘자연인이라 한다(고전2:14). 이런 사람은, 구원에 이를 수 없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랐지만, 이 세상도 사랑하여,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육신에 속한 자’(사르키코스), ‘어린아이 같은, 그리스도인이라 한다. 이들로 인해 교회 안에는, 문제가 생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

비록 넘어지고, 실패하였다고 할지라도,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다(프뉴마티코스)(2:15).

오늘 교회 안에 육신에 속한 자, 많아지는 것이 문제이다. 이들은 자기의 주장, 철학을 내세우며, 감정에 지배받으며 사는 자로 비록 육에 속한 사람은 아니라도, 세상과 적당히 타협해서 사는 자를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

육신에 속한 자, ‘육에 속한 자의 모습은, 하늘과 땅보다, 더 큰 차이가 있다. 이는 구원받았는가?’ 구원 받지 못했는가?’의 차이다. 우리 모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에 속한 자, 신령한 자가 되시기 바란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한다. 오늘 어버이 주일로 지키면서, 우리는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순종해야 한다. 하지만 무조건,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데라는 하란에서 거류하다가 죽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우리는 부모님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전도하며, 영육 간에 잘 보살펴 드려야 한다. 우리 모든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로 영접하여,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영생의 축복을 얻는, 우리 모든 성도님 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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