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8년 9월 1일 - 믿음의 본질(막8:34)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9-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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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본질(막8:34)
지난 주에,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와서, 해야 할 사역을, 4가지로 말씀했다. ① 많은 고난을 받는다. ②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된다. ③ 죽임을 당한다. ④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광의 그리스도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밝혔다. ① 자기를 부인하는 것 ②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③ 예수님을 따르는 것, 3가지로 말했다.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따른다.” “그리스도인이 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닫기를 바란다.
1. 자기를 부인하는 것(34上).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 주변에는 제자들만이 아니라, 무리도 함께 있었다. 그래서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말씀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 무리들 가운데 있는 자도, 제자들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따를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이라면, 믿음의 본질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믿음의 본질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무리와 제자들을, 다 함께 불러서 말씀했다. 믿음의 첫째 요소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다.”(아파르네오마이) = (아포)“~로부터, 떨어져, 분리” + (아르네오마이) “부정하다, 거절하다, 단절하다.” 자신의 의지와 뜻과, 자신의 욕구와, 육체의 유혹을 부정하는 것이다.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주님 앞에 나올 때, 자신의 부족함을 보고,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마음으로 나오기를 바란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불쌍하게 여겨주옵소서.” 이러한 태도에서 믿음은 출발한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자기를 의롭게 여겼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믿음을 가질 수 없었다.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해줄 수도 없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는,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이었다. (빌3:4-6)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이와 같이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며, 자랑거리가 많은 줄 알았지만, 예수님을 따르자, 자기를 부인했다.
(빌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는 이전에 자랑하던 것들을, 다 해로 여겼다. 육체적 자랑거리들을, 배설물로 여겼다. 자기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알았다(롬7:18). 죄인들 중의 괴수요(딤전1:15),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았다(고전15:10). 이처럼 믿음은,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데서 시작된다.
자기를 부인할 때, 비로소 믿음이 생길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하면 부인할수록, 믿음은 더욱 깊어지고,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또 믿음의 본질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지, 자기만족이나, 자기 충족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믿으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믿으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가 아니다.
자기를 위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은, 믿음의 본질이 아니다. 도리어 믿음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부인이며, 믿음의 본질이다.
(막10:28)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지만, 아직 온전히, 자기를 부인하지는 못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온전히 자기를 부인했다. (벧전2: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예수님은 욕을 당하되, 맞대어 욕하지 않고, 고난을 당하되, 위협하지 않았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자기와는 완전히, 결별해야만 한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갈2:20中)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빌1:20下)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부인하며,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또 다시 우리 자신이, 되살아나곤 한다.
2.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34中).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말씀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미 예수님은 자신이 해야 할 사역, 즉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린바 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할 것이라고는, 밝히 말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말씀하는 뜻을, 분명히 이해했을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만 해도, 대략 삼만 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다.
죄수들은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걸어가야 했다. 따라서 당시, 죄수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광경은,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십자가는 죄수를 처형하는 형틀이다. 따라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음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걸어가는 것은,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능력이나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희생을 상징한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 때문에 핍박 받는 일은, 거의 없음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다.
그러나 당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했다.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해야 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곳들이 많이 있다. 북한과 중국이 그렇다. 무슬림 사회도 그렇다. 그 곳에서는, 신앙 때문에 당하는 핍박이 크다.
경우에 따라서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라도,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롬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도 귀하고, 값지다.
(마13장)에서 예수님은, 2가지 비유를 통해, 이 사실을 가르쳤다. 어떤 사람이,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했다. 그는 기뻐하면 돌아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 그 보화는, 자기의 소유 전체보다, 더 값지기 때문이었다.
또 어떤 상인이, 좋은 진주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얼른 가서, 자기의 소유를 모두 팔아서, 그 진주를 샀다. 그 진주는 자기의 소유 전체보다, 더 귀하고, 더 값지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귀하기에, 우리는 각자의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 있다.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아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면, 우리는 목숨까지라도, 아낌없이 바칠 수 있다. (찬송가 94장) 주 예수님보다도, 더 귀한 것은 없기에, 세상 부귀도, 명예도, 행복도, 다 버린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간다. (행14:22中)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 그래서 (행20:24) 말씀과 같이, 사도 바울은 자기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바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기쁨으로 예수님을 따랐다.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그 이유는 믿음의 본질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을 따르는 것(34下).
“…나를 따를 것이니라.” “따를 것이니라.”(아콜루데오) = (아)“부정어”+(켈류도스)“길”이다. “다른 길을 가는 것,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좁을 길을, 계속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다.
“나를 따를 것이니라.” 현재 명령형이다. 그러니까 계속,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다가, 중도에서 멈추거나, 뒤돌아서면 안 된다.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그러면 길인 예수님이,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한다.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과 동행하라. 예수님은 앞서 간다.
앞서 가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가는 길을 막으려 들면 안 된다. 그러면 예수님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통 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서,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는 길을 걸어갔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 일만 생각하면서,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는 길을 걸어가자.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서, 고난 없는 영광만을 바라보지 말자. (막10장)의 내용이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영생을 얻는 길을 물었다. 예수님은 그가, 자기 의에 사로잡힌 것을 보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그의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는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는 길을 걷고자 않았다. 그는 고난 없는 영광만을 바랐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근심하며, 떠나가 버렸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에게, 예수님이 나타났다. 바울은 자기가 가는 길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다. 그 때 예수님께, 이와 같이 물었다. (행22:10上)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님 제가 가는 길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으니, 이제부터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위하여, 제가 무엇을 해야 할는지, 말씀하여 주옵소서. 내가 주의 말씀에 순종하겠나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따르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요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자, 곧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예수님의 참 제자다. 산상수훈의 결론이 무엇인가?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다. (요일2:6) 말씀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예수님이 행하는 대로 행한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생각한다. 예수님의 눈으로 본다.
예수님의 손으로 섬긴다. 예수님의 입으로 말한다. 자연히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예수님을 닮는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의 거룩이, 우리의 거룩이 되기 바란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의 긍휼이, 우리의 긍휼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가, 우리의 겸손이며, 우리의 온유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예수님의 형상이 된다. 예수님의 향기, 예수님의 편지, 예수님의 대사가 되어, 예수님의 충성스런 증인이 된다. 이것이 바로 참 제자의 모습이며, 이것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말씀했다. ① 자기를 부인하는 것, ②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③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이렇듯 믿음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눅13:23)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눅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사람들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원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자기를 부인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기가 어렵다. 예수님을 따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러면 병도 고치고, 마음도 평안해지고, 사업도 잘 된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하다.” 이것은 믿음의 본질이 아니다. 도리어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 믿기가 어렵다면, 안 믿는 사람이 믿겠습니까?”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복음을 변질시켜, 다른 복음을 전하지 마라. 바르게만 전하면 된다. 그 나머지는 하나님의 역사함에 맡겨야 한다. 사도 바울이 고백처럼, 우리 속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우리 힘으로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성령님이 역사하기에 가능하다. (행7:55)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했다. 그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다.
그는 현재의 고난 너머에 있는, 장래의 영광을 밝히 바라보면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바칠 수 있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자. 성령님이 우리에게 바르고도, 본질적인 믿음, 곧 변질되거나, 거짓이 없는 믿음을 줄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름으로,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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