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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9년 5월 12일 - 어버이의 사랑(눅15:20-32)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9-05-12
  첨부파일:   어버이의 사랑.hwp(21K)

어버이의 사랑(15:20-32)

 

오늘 말씀은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다. 이 비유에는 아버지와 두 아들이 등장한다. 흔히 그 중 둘째 아들을 부각시켜서, “탕자의 비유라고도 한다. 이 비유를 통해서, 자녀를 향한 어버이의 사랑과 자녀들이 화목하기를 바라는, 어버이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과, 우리에게 바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깊이 깨달을 수 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특히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다.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더욱 공경하자. 부모님이 원대로, 형제 사이에 화목하게 지내서, 그 가정에 하나님의 복이, 넘치기를 바란다.

1. 둘째 아들의 모습(11-12).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와서,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미리 나누어달라고 요구했다. 율법에 의하면, 아버지의 재산은 장남에게 2/3, 차남에게 1/3을 물려주도록 되어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 물려주도록 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그 분깃을 미리 달라고 요구했다. 동생이 아버지에게 잘못된 요구를 하면, 형이 나서서 동생을 꾸짖어야 옳았지만, 형은 침묵했다. 형의 관심도, 아버지의 재산에 있었을 것이다. 이 때 아버지는 얼마든지, 둘째 아들의 요구를 묵살할 수도 있는데, 아버지는 그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다.

아버지는 그 살림을, 두 아들에게 각각 나누어주었다. 이는 사랑과 자비의, 아버지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아버지이다. 기독교는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하지만, 무슬림의 하나님은, 무섭고 두려운 뿐일 뿐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말이, 안 된다고 믿는다. 무조건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

(13-14)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그 후 며칠이 안 되었다. 둘째 아들은, 잠시도 지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마음도 없었고,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어서, 한 시라도 빨리, 그 곳을 떠나고 싶었다. 둘째 아들은 자기의 재물을 다 모았다. 그런 후에 그는, 먼 나라, 이방 나라로 갔다. 그는 그 곳에서, 허랑방탕하며, 그의 재산을 낭비했다. 부도덕한 삶으로, 그의 재산을 탕진했다.

그 때문에, 탕자라는 말이 생겨났지만, 성경에는 탕자라는 말은 없다. 지금 둘째 아들 수중에는, 돈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머물었던 이방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 그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이제 그는, 먹고 살기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해야만 했다.

(15-16)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둘째 아들은, 먹고 살기 위해,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 곧 이방인에게 붙여 살았다. 이방인은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했다.

둘째 아들은,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를 먹고자 했지만, 돼지들이 그들의 먹이를, 빼앗길 리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자가 없었다. 결국 둘째 아들은, 돼지보다도 더 못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드디어 둘째 아들은, 정신을 차렸다. 사실 그는 그 동안,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저버리고, 멀리 떠나왔다가, 이제야 잘못을 뉘우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 아버지에게는그는 그 동안 아버지를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궁핍하게 되니까, 비로소 아버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기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많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품꾼은 그 날 벌어서, 그 날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에게 있는 품꾼들은, 양식이 풍족하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넉넉한 삯을 주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떠올렸다. 그런데 지금 둘째 아들의 처지는 어떠했나?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를 깨달았다.

바로 여기서, 그의 회개가 시작되었다. 이렇듯이 회개는, 자신을 바르게 아는 데서 시작된다. (18-19)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둘째 아들은 그 동안, 자기가 갔던 길에서, 돌이키기로 했다. 그는 그 길이, 자기를 죽음으로 인도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자비를 바라면서,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에게 지은 죄가, 하늘에까지 미칠 정도로 크다는 사실을, 고백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죄에 대해 변명하거나, 남의 탓으로 돌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기를 아들로 여기지 말고,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애원하기로 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아무 요구도 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자비함에, 그 자신을 맡기기로, 마음을 정했다.

둘째 아들의 잘못은 무엇인가? 아버지의 사랑을 저버리고, 아버지를 멀리 떠난 것이다. 그의 회개는,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아버지께로 되돌아온 것이다. (6:37)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언제나 예수님에게, 되돌아오기를 바란다.

2. 아버지의 모습(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제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왔다.

아들은 정말, 안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먹지 못해서 말랐다.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몸에는 돼지 냄새가 나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에게서 받을 멸시를 생각하면, 그의 마음은 심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아직도 거리가 멀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알아보았다.

이미 아버지는, 그가 돌아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계속 동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겼다. 사실 아버지는 그를, 괘씸히 여겨야 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저버렸으며,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의 위신과 명예를,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측은히 여기고, 그에게 달려갔다. 유대인들은 뛰지 않는다. 뛰다보면 몸에 두른 옷 사이로, 하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하체를 보이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뛰었다.

둘째 아들이 동네로 들어오면, 동네사람들이 그에게, 욕을 할수도 있고, 침을 뱉을 수도 있다. 돌을 던질 수도 있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이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그에게 재빨리 달려갔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아들이 당해야 할 수치를, 자신이 대신 당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안았다. 지금 아들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으니, 몸에서는 역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러한 것들을 조금도, 문제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이것은 아버지가 그를 사랑해서,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며, 다시 그를, 아들로 맞이한다는 뜻이었다. 이것이 바로, 자녀를 향한 어버이의 사랑이다. 또한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죄로 얼룩진 우리를, 측은히 여겼다.

예수님은 멸시를 무릅쓰고, 우리에게 달려왔다. 우리의 목을 안고, 우리에게 입을 맞췄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했다.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이는 둘째 아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실제로 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말과, 이전에 혼자 한 말(18-19)을 비교하면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가 빠졌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그의 죄를 용서하고, 아들로 맞아준 것은, 아버지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품꾼으로 써달라며, 자기의 행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만일 여기서, 자기 자신의 행위를 내세우려고 했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품꾼의 하나가 되어, 일하겠다는 말을 빼버렸다.

(22-24)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혀라.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라. 발에 신을 신기라.” 아버지는 아들의 품위와, 권위와 신분을 회복시켜주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받아주되, 바로 그 자리에서, 그의 모습 그대로 받아주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종들에게 명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모두가 함께 먹고, 즐길 수 있는, 큰 잔치를 베풀라고 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어야 할, 이유를 밝혔는데, 둘째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얻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말에, 종들은 즐거워했다. 아버지는 큰 잔치를 베품은, 종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둘째 아들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다시 얻은 것이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아버지는 그 자신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푼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어버이의 마음이다. 자녀가 바르게 행하며, 자녀가 잘 되면, 부모님은 자녀로 인하여, 그 자신이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하며, 즐거워한다. 부모님의 마음을 잘 헤아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3. 맏아들의 모습(25-27).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잔치를 베풀기 전에, 아버지는 맏아들과 상의를 하지 않았다. 또 잔치를 베풀고 난 후에도, 아버지는 사람을 보내어, 맏아들을 밭에서 불러오지 않았다. 아버지와 맏아들 사이가, 그만큼 멀었다.

아무튼 맏아들이, 집에 가까이 왔을 때, 집안에서 들려오는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맏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했다면, 그는 즉시 집안으로 들어가, 아버지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맏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 종을 불러서,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종을 통해서, 자기 동생이 돌아왔음을, 알게 되었고, 아버지가 그의 동생을 다시 맞아들여, 기쁨으로 큰 잔치를 베풀었음도 알게 되었다. 맏아들은 그 동안, 아버지가 동생을 애타게 기다려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얼른 집으로 들어가서,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옳았다.

아버지의 기쁨이, 그의 기쁨이 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맏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가 동생을 영접했기에, 맏아들은 노했다.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를 벌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어떻게 했는가?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그 잔치는 아버지를 위한 잔치였다. 그 잔치의 주인공은, 아버지였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맏아들을 위해서, 잔치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는 맏아들을 찾아와서, 여기 있지 말고, 집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즐기자고, 그에게 권했다.

이것이 바로 어버이의 사랑이다. 둘째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모든 수치를 무릅쓰고, 그에게 달려갔다. 맏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그를 찾아 나와, 사랑으로 그를 권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며, 예수님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몸소 우리를 찾아와, 우리를 천국으로 초청했다.

이 사랑을 저버리지 않는, 우리가 되기 바란다. 그런데 이 때, 맏아들의 반응은 어떠했나? (29-30)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여기서 맏아들은, 자기 행위를 내세우며 스스로를 의롭게 여겼다. 더 나아가, 아버지를 탓하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가, 의인인 자기에게는, 염소 새끼라도 준 적이 없었으면서, 죄인인 동생에게는,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불평했다.

이렇듯 맏아들은, 아버지가 잘못했다고, 틀렸다고, 감히 아버지를 비난했다. 이 때 아버지는 엄하게,맏아들을 꾸짖으면서, 큰 벌을 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맏아들이 잘 알아듣도록, 부드럽게 타일렀다. (31-32)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가 의도는 이러했다. “얘야, 들어가서 함께, 즐거워하며 기뻐하자.” 그러면서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함을 일깨워주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버지가 기뻐하면, 아들도 기뻐해야 마땅하다. 비유는 여기서 끝을 맺었다. 비록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탕자의 비유가, 이렇게 끝났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이에 맏아들이 돌이키고, 아버지와 함께 들어가니, 모두가 즐거워하더라.”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 어버이 주일이다. 우리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부모님을 공경하자. 아울러 형제들 사이에 화목하자.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한 대로, 우리 모두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는 복을, 풍성하게 누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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