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8년도 1월 21일 -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요일5:1-3)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8-02-11 |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요일5:1-3)
지난 말씀에,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의 날에 담대함을 갖게 한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말하는 자이니, 형제를 사랑하라고 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말씀한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갈 때, 우리를 계속해서 “내가 진짜 구원받은 사람인가?”하는 질문이 생긴다. 사도 요한은, 이 질문에 대해 요한일서 내내, 답변을 시도했다.
왜냐하면, 특별한 지식을 알아야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구원론을 믿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들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인간의 몸으로 와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예수와 그리스도는 다른 존재이며, 예수에게 하나님의 영이, 잠깐 임했다가, 죽을 때에, 다시 돌아갔다고 믿었다. 영이 중요하고,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어떤 행동을 해도, 구원받는다 했다.
그래서 잘못된 주장들 가운데, 구원받은 사람이 무엇인지 말했다. 그로부터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러한 문제는 여전히 똑같이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문제의 답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 누구인지, 오늘 말씀에서,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1.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1上).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 했다. ‘믿는 자’(피스튜온)는 현재형, ‘난 자’(게겐네타이)는 완료시상이다.
헬라어 시상은,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먼저요, 믿음은 그 다음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는, 전제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 혹은 증거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다는 말이다. ‘믿는다.’는 말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된, 메시아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에, 이런 말을 했다. 성경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다. 유대인이 대망하던 메시아,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고 했다. 유대인은 참된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 역할을 하는, 구원자가 온다고 믿었다.
왕은 정의를 실현하고, 완전한 선으로, 백성들을 통치하며,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바르게 전했다.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 드려, 용서받게 하는 사명을 맡았다. 메시야는 이러한 3가지 요건을, 완벽히 갖춘 자여야 했다.
따라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를 온전히 다스릴 왕이며, 진리로 인도할 선지자며, 우리 죄를 해결할, 제사장으로 고백해야 한다.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림에, 복종하고, 선지자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배우며, 제사장 예수님께, 죄 짐을 의탁하고 내려놓아야 한다.
예수님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5-16). 초대 교회에서 선포된, 핵심 말씀이며, 가르쳤던 내용이다(행5:42).
즉,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여부가,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을 구분 짓는, 가장 핵심 부분이다. (1中)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낳으신 이’(겐네산타)는 ‘낳다’(겐나오)의, 부정과거 분사로, 아버지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신자들을 이미 낳고, 자녀삼아 주었으며, 친히 아버지가 되었다. 하나님과 신자를 가족으로 표현했다. ‘난 자’(게겐네메논)는 수동태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다. 완료형은 행위가 과거에 끝나, 결과가 계속됨을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태어나게 하는 사역은, 이미 과거에,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끝난 일이다. 반면 ‘믿는 자’는 현재형이다. 거듭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믿고 있다. 믿음은 늘 현재다. 과거에 믿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미래에 믿겠다는 말도, 믿는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로 구원을 설명하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했다. 이때 가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일이다. 계속 붙어 있을 때, 생명이 들어와서, 열매가 맺히게 된다. 생명의 열매가 나타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속에 흐르니까,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과 삶이,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인데, 그리스도의 보혈로 살렸다. 도무지 열매를 맺을 수 없었던 우리에게, 생명의 열매가 맺혔기에, 감사할 수 있다.
요한은 내가 중생했는지, 하나님이 나를 택했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을 향해, 대답했다. 지금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있다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 맞는다고 했다. 죽은 줄 알았던 나무가 싹이 났다면, 생명이 있기에, 열매를 기대하게 된다.
생명의 열매는 무엇일까? (1中)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를 낳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낳은,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한다고 했다.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고, 지체들을 사랑하는 것이, 생명의 열매다. 사랑이 생명의 열매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다.
2. 계명을 따라 사랑한다(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안다고 했다.
하나님의 자녀가 먼저 나와, 강조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하나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라는, 그의 계명(4:21)을 지킬 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더 확실해진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막연한 감정적 상태가 아니라, 주님이 말씀한 것을 듣고,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했다. 하나님을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위를 세워주기에, 그 명령을 따르게 된다.
이는 계명을 지킴으로, 의로움을 얻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계명의 지킴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도 사랑하게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계명을 지킨다.
(마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의 자녀들인 형제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렇다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구원받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반드시 이웃 사랑을,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웃 사랑을 실천함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랑을, 충분히 증거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형제 사랑의 실천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세상과 높은 담만 쌓는다고, 거룩한 공동체,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 권위에 순종하는 모습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이다.
3.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어렵거나 무거운 것이 아니다(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십자가가 되고, 죽을 만큼 힘든 일인가?
하나님의 뜻 앞에서 꾹 참고, 이를 악 물고, 견뎌야만 구원을 얻는가? 아니다. 요한은 주님의 계명은 ‘무거운’(바뤼스), ‘짐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신30:11-14)을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그러니까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이, 처절한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로 올라가거나, 바다를 건너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 쉽다는 말이다.
서로 사랑하면, 훨씬 행복해진다. 그런데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다투고 분쟁하며 살기 때문이다. 이 모든 분쟁의 배후에는, 타락한 인간의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의 배후에는,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인 사탄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근거로 해서, 인위적으로 만든 613가지 규례의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고 있었다. 도저히 지킬 수 없도록, 복잡하고 힘들게 만들었다. 이와 같이 지친 사람들을, 예수님은 초청 했다.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 자신이 주는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분명하게 말씀했다. 예수님이 주는 계명이 쉽고, 가벼운 이유는, 바로 주님이 성도들과 함께 멍에를 메고,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자의 요구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는, 하나님의 계명을, 스스로 지키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더 이상 계명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기쁨이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기쁨으로 행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교회에서 함께, 서로 사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우리를 화나게 하는 일들이, 정말 많다. 내가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말은, 전에 없었던, 새 가족이 생겨난 것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이다. 어린 영혼들을 사랑해야 한다.
가족과 함께 사랑하며, 섬기며 나누고, 베풀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평안을 준다. 그런데 타락한 우리는, 그것을 잘 하지 못한다. 남의 허물을 들추기를 좋아하기에, 신앙생활이 힘들어진다.
좋아서 하는 일은 즐겁다. 사랑해서 하는 일은, 기쁨을 준다. 엄마가 아이들을 사랑하면, 새벽밥을 해도 신난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지겹다. 신세타령을 한다. 사랑해서 하는 일은, 지겹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랑이 없는 섬김과, 사랑이 없는 일이 지옥이다.
무슨 일을 할 때, 기쁨으로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만난다. 먹기 살기 위해 하는 사람은, 매사에 전투적이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친절할 수 없다. 무슨 일만 생기면, 큰 소리가 나고, 다투고 화를 낸다. 그러면 스스로, 지옥을 만드는 삶이 된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 도저히 차를 운행하기 힘든 날이었다. 그런데 택시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날에, 우리 같은 사람이 있어야만, 손님들이 편히 가실 수 있지 않느냐면서, 자신은 이 일을 사명감을 가지고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분은, 위험하고 짜증스러운 눈길을, 즐겁게 운행하고 있었다.
형제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심은,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거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며, 공동체의 지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하라. (엡4:15上)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을 한다면, 상처가 되지 않는다. 사랑이 답이다. 지금 교회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만 가지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다 연약하기에, 우리 의지만 가지고, 서로를 사랑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였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사랑할 힘을 주어야,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다.
돈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재능을 나누고, 칭찬이나 사랑의 말로 격려할 수 있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충만하게 우리를 다스려야, 허물을 끌어안는 사랑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령 충만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은혜를 먼저 받아야 한다. 우리가 예배를 등한히 하고, 말씀과 기도에 힘쓰지 않으면, 형제를 사랑할 능력이 없다. 저절로 우리 안에, 형제를 사랑할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늘 먼저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구원받은 신앙은, 결코 교리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며, 인본주의적 사랑을, 따라감도 아니다. 우리는 올바른 신앙 위에 서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우리 신앙을 사랑의 행위로 드러내는, 병행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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