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8년도 1월 7일 - 성령으로 알게 되는 것(요일4:13-16)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8-0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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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알게 되는 것(요일4:13-16)
요한은 지난번에 사랑하는 자들을 부르며, 서로 사랑하자고 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다. 사랑의 모델은,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화목제물로 보내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의 아들을 주었다. 하나님이 이같이 사랑했으니, 서로 사랑함이 마땅하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룰 수 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알게 되는 것들을 말한다.
1. 성령님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게 한다(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한은 성령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또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함으로 안다고 했다.
여기에서 ‘주시므로’는, 이미 완료된 완료형이고, ‘거하고’(메노멘)와 ‘아느니라’(기노스코멘)는 현재 시상이다. 현재시상은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기노스코멘’을 사용한 것은,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들은 신비한 지식을 깨달은 자신들만, 안다고 했다.
그러나 이를 반박하면서, 성령이 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거함을 알고,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확신을,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이며, 지속적인 교제로, 상호간의 거함을 확신한다.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요일3:24中)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했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에게 준 성령은, 성도들 안에 거하면서, 영적 깨달음을 주는 분이다. 성도는 성령과 더불어, 세상을 살아간다. 성도는 홀로, 이 세상을 살아가지 않는다.
이는 단순하게, 다른 이웃과 함께 산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도는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아간다. 따라서 환난과 고난 앞에서도, 외로워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만 하면 된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기에, 우리는 환경에 좌우되지 않고, 확신한 일에 거할 수 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면서,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이 온 이유이며, 성령의 능력이다.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는 삶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함을 받기 위해, 늘 깨어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예수님은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요20:22中)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했다.
그 이유는, 성령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과 연합할 수 없고, 주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고, 확신한 일에 거할 수도 없다. 또한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는, 복음을 전할 수도 없다. 또한 복음의 능력도 나타나지 않는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확신하게 된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우리의 관계가, 영원히 맺어진다. 이 영원한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에 대한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홀로 내버려진 ‘고아’가 아니다(요14:18). 그러므로 매일, 성령 충만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실 때만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질 수가 있다. 매순간 성령님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과 한 몸 되어, 확신에 거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표현을 다른 말로 하면, 그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말이 된다.
2. 성령님은,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을 보낸 이유를, 믿고 시인하게 한다(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아버지가 아들을 보낸 이유는, 세상의 구주로 보냈다.
‘구주’(소테르)는,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 하나님이 약속한,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이다. 죄와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해방시키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영지주의 이단은, 구원을 영적인 무지로부터, 특별한 영적 지식을, 깨달아 얻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아,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영적 지식을 아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이단의 가르침 앞에,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낸, 인격적 존재로서, 분명한 구주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을 우리가 ‘보았고’(완료), 또 ‘증언한다.’(현재)고 했다.
헬라어 동사에는, 인칭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에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헤메이스)가 독립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우리’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요한을 비롯한, 예수님의 사도들을 지칭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예수님을 증언하는(마르튀루멘, 현재 분사) 자들이다. 사도들과 함께 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게 한 성령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면서, 믿음으로 보게 한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았지만, 그분이 하나님임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의 요청에 (요14:9)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말씀했다. 그들 앞에, 하나님이 있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하였다.
그들은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고, 듣고 있으면서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이렇게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실제 모습을 보지 않고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성령을 통해 보는 성도들이다. 우리는 보지 못하나, 성령으로 보고, 알고 믿게 되었다.
성령님에 의해서, 하나님을 본 자는, 반드시 계속해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증언할 내용은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주라는 것이다. 세상의 구주라고, 시인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예수님이 승천한 후에, 하나님을 직접 보았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폄하하며, 자신이 예수님보다 더 위대한 선지자라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다. 그는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복된 소식을 저주의 소식이 되게 하였다.
또한 오늘, 종말론과 관련하여, 수많은 이단들이 끊임없이 나타나서, 하늘 보좌를 탈취하려고 한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에 이르는 ‘특별한 비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자신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더 유혹한다. 거짓된 증거일 뿐이다.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누구든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거함이,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이것은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신비한 지식을 소유한 그들만 구원을 얻고,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단 하나의 전제 조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예외가 없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선언한다.
‘시인하면’(호몰로게세) ‘호몰로게오’(고백하다, 인정하다, 드러내어 말하다)의, 가정법 과거다. 어떠한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여, 드러내 놓고 말함으로, 개인의 전인격적인, 고백을 표현하는 말이다. 가정법 과거는 일회적인 동작을 말한다. 말하는 사람이, 전 인격적으로, 진정으로 드러내어 말했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함은, 개인의 신앙고백이다. 이러한 고백은 성령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고백이 있는 자들 가운데, 하나님은 영으로 그들 안에 거하시고, 그들도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중요한 부분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고, 성령으로 충만히 거하기 위해서는, 이 신앙고백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신성 모독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마26:63-66).
따라서 당시의 상황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먼저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 자백해야 한다. 입으로 시인해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3.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믿고 거하게 한다(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만일 예수님을 보낸,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모든 인간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죽음 가운데서 살리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 가운데 내어주었다. 화목제로 보내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믿었다.
‘알고’(에그노카멘)는 ‘기노스코’의 현재 완료로, ‘경험과 체험’으로, 얻은 지식을 말한다. ‘믿었노니’(페피스튜카멘)는 ‘피스튜오’의 현재 완료로, 대상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확고한 믿음을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미 과거에 경험하여,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알고, 믿고 있음을 말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확신할 수 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지식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 이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는 지식을 얻지 못한 채, 다른 영적인 지식들만을 간구하고 구했다.
요한은 이러한 그들의 사변적이고, 잘못된 지식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기록했다. 참된 믿음은, 바른 지식을 통해 형성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온다(롬10:17).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이 지식이 되어, 우리의 믿음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머리로만 이해되는 지식이 아니라, ‘기노스코’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삶 속에서의 경험과 체득되는, 전인격적인 지식을 가리킨다. 요한이 알고 믿었던 내용은,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그 사랑(아가페)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준 사랑’이라는 의미이다.
또 ‘거하는’(메논)은 ‘머물다.’(메노)의 현재 분사로, ‘항상 머물러 있는’이라는 지속적인 상태를 나타낸다. 이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떠날 수 있는가? 만일 주님을 버리고 떠났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자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삶 속에서 행한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말씀하고, 순종하도록 힘을 주기에,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사도 요한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증언하는, 3가지를 언급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는, 3가지 증거를 말했다. ① 하나님과 우리의 상호간의 거함, 하나 됨 ②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시인하게 된다. ③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믿게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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