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6년 6월 19일 -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롬8:35-39)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6-0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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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롬8:35-39)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느냐?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다고 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고발하겠느냐? 누가 정죄하겠느냐고 했다. 하나님은 부활 승천해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했다.
이제 (롬8장)의 클라이맥스이다. 성경 전체에서 볼 때, 이 부분보다 더 위대하고, 놀라운 부분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성도의 구원을 방해하는, 모든 도전에 대해 말하고(35-37). 이 모든 도전들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담대하게 선언하고 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견고함과, 확실성으로 그의 논증을 끝맺고 있다(38-39). 이 결론은 (8:31)부터 시작된, 논증의 결론인 동시에, 또 (롬8장) 전체에서 언급된, 논증의 결론이다. 따라서 힘든 세상 속에서, 구원의 확신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1.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랴?(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느냐고 질문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 구원을 방해하는 많은 도전이 있기에, 그렇다면 내가 모든 방해를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을까? 혹시 사는 동안,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지고 타락해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는 않을까?’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수많은 시련과 환난과 고통을 받는다. 시련이 심해지면, 시련을 이길 수 없을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이러한 때에 권력자의 사랑을 받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고 재력가의 사랑을 받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겠는가?
최고 권력자 대통령이, 내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상의할 수 있다면, 이는 정말 힘이 될 것이다. 재벌만 알고 있어도, 정말 대단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권력자나 재벌가가 문제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지으셨다. 그렇기에 우리의 힘이 되신다.
환난(립시스, 압박)은, 외부에서 눌러서 터진, 상처와 어려움을 말한다. 곤고(스테노리아)는 스테노스(좁은) + 라(공간) = 환난으로, 좁은 공간에서 느끼는 고통을 말한다. 박해(디오그모스, 도망하다, 추적하다)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쫓김 당하는, 환난을 말한다.
기근(리모스)은 식량부족으로 인한 배고픔이다. 적신(귐노테스)은, 벌거벗음으로,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무방비 상태를 말한다. 위험(킨뒤노스)은, 배신과 학대로 인한 위기이다. 칼(마카이라)은, 전쟁터에서의 죽음과, 살해되어 죽는 죽음을 상징한다. 바울이 이러한 고통을 바울은 실제로 당했다.
(고후11:23-27)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다른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받았다. 그래서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오죽했으면, 도살당할 양 같다고 했을까! 그러나 이 말씀은, (시44:22)을 인용한 말씀이다.
(시44: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이러한 환난과 시련은, 구약의 성도들만 아니라, 오늘의 성도들도, 당할 수 있다. 성경은 성도들이, 어려운 일들을, 통과할 때가 있다고 말한다. 어려운 일이 나타난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위험과, 고통과 시험을 언급한다. 바울은 성도들이 환난과 재난, 기근과 박해, 헐벗음과 위험, 또한 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구약저자도 ‘온 종일 주를 위해, 죽임을 당하고, 도살당할 양처럼 취급받았다.’
바울 당시에 로마교회 성도들은,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로마제국은 로마 황제를 주라고 부르도록 강요했고 이를 거부하는 사람을 박해하고, 노골적으로, 무참히 짓밟았다. 구약의 성도들처럼 그들도 역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취급을 받았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불같은 시험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지 못할 것 같은 무서운 핍박이, 로마 성도들에게 있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환난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끊어지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뿐이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 진짜 신앙인지, 가짜 신앙인지를 구별한다. 가짜들이 많을 때, 하나님은 어려운 시험을 통해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한다. 그러면 핍박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졌는가? 아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그 어떤 핍박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2. 넉넉히 이기느니라(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바울은 참된 성도들은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선언한다. 고통을 당할 때, 인내하고 승리한다.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이길 수 있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원수들은 성도들을, 작은 지하 옥에 가두고,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지 않고, 심한 매질과 고문을 가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일에 대해, 성도들이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담대하게 선언하였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우리 성도들이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을 받는, 선택된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러주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다. 또 하나님은 그들이, 시련을 통해 더 견고한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연단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아주 넘어지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신실한 사랑, 영원한 사랑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어떤 시련과 박해도 ‘넉넉히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시련을, 겨우 이기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이 모든 시련과 고난을 ‘충분하게 또는 넉넉하게’ 이길 수 있게 한다. 실제로 어렵고 힘든 삶에서,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을까?
기독교작가 정연희가 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실화소설에 ‘맹의순’이라는 한 신학교 출신의 사람이 나온다. 6.25피난길에서 빨갱이로 오해를 받고, 채포를 당해 포로수용소에 들어간다. 유달리 이웃을 돕고, 복음전도에 헌신적인 사람인데, 빨갱이로 오인되어, 포로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도 인간이기에,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 왜 이런 고난을 허락하나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수용소에 들어가자마자, 거기에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았고, 전도할 수 있는 대상이 많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을 모아서, 광야교회를 시작했다.
그 광야교회가 세워지던 그날, 그는 너무 기뻐서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 저를 여기에 보내신 이유를 알았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기에, 저를 여기에 보내셨습니다.” 그 순간부터 맹의순 선생님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어째서? 왜? 라는 질문은, 깨끗이 사라졌다.
그러다가 얼마 후, 그 수용소에 중공군 포로들이 몰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맹의순 선생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내가 갈 수가 없었던 중국, 그 곳에 가기 위해서, 일생 헌신하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교사로 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내 앞에 중국 사람들이 몰려오다니…,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선교의 현장으로 보내주셔서, 섬길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니, 감사하다는 기도를 했다. 날마다 감격이고, 선교와 봉사의 현장이고, 복음전도의 현장이었다. 그는 세월이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맹의순의 친구들이, 그가 억울하게 잡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구명운동을 시작했다. 석방 탄원서에, 자기 이름만 서명하면, 수용소를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러나 맹의순 선생님은, 그 서명을 거절한다. 하나님이 그를 그 곳에 보내셨는데, 나가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날도 새벽 한시, 두시, 세시까지 중환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손발을 씻기고, 복음을 전하고 찬송가를 가르쳐 주고, 시편23편을 읽어주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숨을 거둔다. 그의 장례식에 한 장의 편지를 가져와서, 얼마나 열심히 섬겨주었는지 읽었다. ‘그들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했다.
3. 결론 :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 동안 했던 말에 대해, 결론 내렸다. 그는 결론을 우리말성경에는 생략되었지만, ‘왜냐하면’으로 시작한다. 지금 바울은 성도들이,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38-39).
칼이 능력이 아니다. 돈이 능력이 아니다. 하나님이 능력이다.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능력이다. 바울은 성도들을 이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다. 우리말 성경에서 ‘내가 확신한다.’는 능동형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원래 이 말(페페이마이, 페이)은 수동태다. 이 말은 바울이 확신을 갖도록, 하나님에 의해 되었다는 말이다. 그 동안의 논증(설득)을 통해서,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구원받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증 과정 속에서, 성령님은 그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히, 변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힘든 세상 속에서, 멋있게 살기 위해서는,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확신해야 한다. 그래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믿음으로 살 수 있다.
그 동안 바울은 성도의 사랑, 예정, 부르심, 의롭다 하심, 그리고 영화에 이르는 전 과정을 생각했다. 이러한 과정을 묵상하면서, 이 세상 어느 것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비록 성도들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위험과 시련을 겪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중단시킬 수 없다고 확신했다. 사망이나 생명도,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취소할 수 없으며, 천사와 악한 천사들과 권력자도, 성도들의 구원을 막을 수는 없다. 하나님은 한 번 선택하고 부르신 자기 백성들을, 성령과 천사들을 통해서 끝까지 지켜 준다.
또한 그들이 영화롭게 될 때까지, 인도해 줄 것이다. 현재 일이나, 미래의 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으며, 가장 높은 곳이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현재 일과 미래 일을 모두 다 알고 있고,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까지 모두 주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어느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라 불렀다. 이것은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중보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을 자신의 자녀로 삼으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포기되거나, 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처럼,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담대하게 선언할 수 있다.
자살이라도 하고 싶었던, 파산과 배신의 사건, 힘든 생활 문제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넉넉히 이긴 간증이 있나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기에, 두려움 없이 포기하고, 순종한 간증이 있나요? 나를 해칠 수도, 살릴 수도 없는 피조물에 연연해서, 패배감에 젖어 살지는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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