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5년 5월 10일 -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형(눅15:25-32)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5-05-17 |
첨부파일: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형.hwp(39K) |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형(눅15:25-32)
지난주에 나는 말씀은,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가서,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분배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버지는 그 요청이 무례한 것을 알았지만, 작은 아들이 강하게 요청했기에, 할 수 없이 재산을 분배해 주었다.
작은 아들은 즉시 재산을 정리해서, 먼 나라로 갔으며, 그 곳에서 허랑방탕한 삶으로, 모든 재산을 허비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게 되어, 종이 되고 말았다. 먹을 것이 없어, 그 집에서 돼지가 먹는 사료를 먹었는데, 그것도 먹지 못하여, 굶어죽게 되었다.
그때 차라리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품꾼으로 살기로 결심하고 돌아갔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둘째 아들을 영접하였고, 작은 아들을 용서하고, 상속권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여,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었다.
탕자는 하나님을 떠나, 허랑방탕한 살던 죄인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짐승처럼 살았다. 그렇지만 복음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돌아왔다. 하나님은 돌아온 우리를 보고, 아들로 맞아 주며, 크게 기뻐하셨다.
그 동안은, 집을 나간 작은 아들과, 이를 용서하신 아버지의 사랑에 관해서, 이야기를 했다. 이제 전개되는 이야기는, 분노하는 형과 그를 권면하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오늘 말씀은, 돌아온 동생을 너무 후하게 대접하는, 아버지의 처사가 못마땅한 맏아들의 이야기다.
1. 형이 돌아온 동생의 소식을 들음(25-28).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맏아들은 집 근처에 왔을 때, 집에서 풍류와 춤추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맏아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서, 아버지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한 종을 불러서, 집에서 풍악(쉼포니아)과, 춤추는(코로스)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물었다. ‘물었다’(에퓐네토, 퓐노마이)는 미완료형으로 ‘계속해서 묻기 시작했다’ 심문하는 것처럼, 자세히 물었다는 의미이다.
그 종은 맏아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그 동생이 돌아왔다.’ 종들은 아버지가 늘 기다리고 있었던, 그 아들이 돌아왔다고 했고, ‘그래서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되어서,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고 했다.
‘다시 맞아들이게 되었다.’(아폴람바노)이 ‘떨어져서’(아포)와 ‘얻는다.’(람바노)가 합해진 말로, ‘다시 얻었다.’는 뜻이다. 형은 종을 통해, 동생이 돌아왔음을 알았다. 동생이 건강한 몸으로 돌아오자, 온 집안은, 죽거나,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얻은 것처럼, 축제 분위기에 싸였다.
맏아들은 그 동안 아버지가, 동생을 애타게 기다려왔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빨리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했다. 아버지의 기쁨이, 그의 기쁨이 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맏아들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환대한 일에 대해서, 크게 노했다.
‘노한다.’(오르기조)는 ‘콧구멍을 벌름거린다.’에서 온 말이다. 이 말은 일시적으로, 격양된 감정에서 나온 분노가 아니다. 깊이 쌓인 분노와 노여움을 의미한다. 이러한 맏아들의 모습은, 죄인들을 용납하는 예수님을 보고, 원망하였던,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일치했다.
맏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28). 맏아들이 집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다는 소식은, 곧 아버지에게 전해졌다.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고, 친히 집밖으로 ‘나와서’ 맏아들에게 작은 아들을 용납하도록 권했다.
맏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을 영접했기에 노했다. 그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를 벌하지 않고, ‘아버지가 나와서 권했다.’ 그 잔치는 아버지를 위한 잔치다. 그 잔치의 주인공은, 기쁨을 함께 나누기 원하는 아버지였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맏아들이 들어오지 않자, 맏아들을 위해, 잔치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맏아들을 찾아와서, 여기 있지 말고, 집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즐기자 권했다. 이것이 바로 어버이의 사랑이다. 둘째 아들을 보고서, 아버지는 모든 수치를 무릅쓰고, 그에게 달려갔었다.
또 아버지를 공경하지도 않는, 맏아들이었지만, 그를 찾아 나왔다. 그리고 사랑으로, 그를 권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예수님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몸소 우리를, 찾아오셨다. 우리를 천국으로 초청했다. 이 사랑의 초청과 권면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여기서 ‘권한다.’(파레칼레이, 파라칼레오)는 ‘옆에 서서, 다정하게 말하거나, 친절히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완료 형으로 아버지의 권고가, 계속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때 맏아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오히려 아버지를 비난했다.
비정한 형은, 죄인들을 용납하는 예수님을 보고, 비난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넓게는 같은 생각을 가진 유대인을 말한다. 겉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율법에 충성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하지도 못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
2. 항의하는 맏아들(29-30).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맏아들은 마침내, 마음에 품고 있었던 불만을 아버지에게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위해, 염소 새끼를 잡아서, 친구들과 즐기게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맏아들은 ‘내가, 내가’ 하면서, 자신을 나타내기를 원했다. ‘명을 어김이 없거늘’하면서, 자기 의를 드러냈다. ‘섬겼다.’(둘류오)는 ‘종이 상전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자녀로서 아버지에게 순종한 것이 아니라,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아버지를 섬겼다. 대가를 바라고 일했다는 말이다.
의무감으로 하나님을 섬기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교제보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기에, 급급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이, 의무적으로 명령인 율법을 지켜왔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자만했다.
유대인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의롭게 여겼고, 죄인들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자기행위를 내세우며, 스스로 의롭게 여겼다. 더 나아가 맏아들은, 아버지를 탓하기까지 했다. 아버지가 의인인 자기에게는, 염소 새끼도 준 적이 없었으면서, 죄인인 동생에게는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불평했다.
맏아들은 계속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집을 나간 동생이, 허랑방탕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재산을, 창기들과 더불어 날려버렸다.’는 말은 추축이다.
상대방의 잘못에, 내 추측을 더하여, 판단하면 안 된다. 맏아들은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편애하고, 공의에 벗어난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께 일평생 순종한 자기는, 대접받지 못하고, 방탕한 삶으로, 재산을 날려버린 동생은, 대접받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동생을 가리켜 ‘이 아들’이라고 불렀다. 우리 성경에 ‘이 아들’은, 원래 ‘당신의 이 아들’(호 휘오스 수 후토스)이다. 맏아들은 동생이라 부르지 않고 ‘당신의 이 아들’이라 했다. 그는 형제로 취급하지 않았다. 이는 세리와 죄인을 용납하는, 예수님을 비난하던,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일치했다.
이렇게 맏아들은 아버지가 잘못했다고, 감히 아버지를 비난했다. 이 때 아버지는 엄하게, 맏아들을 꾸짖으면서, 벌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인자하고, 사랑이 많은 분이기에, 맏아들이 잘 알아듣도록, 다음과 같이 부드럽게 그를 타일렀다.
3.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1-32).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그러자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맏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특권이, 얼마나 큰지 알지 못했다. 그는 장자로서 아버지 재산의 2/3를 상속받았고, 아버지가 가진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실상 아버지의 것은, 모두 그의 것이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장자로서, 제사장 나라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특권과 책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들을 선민이라고 자랑하면서, 다른 민족들을, 이방인이라고 멸시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맏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맏아들은 ‘당신의 이 아들’이라고 불렀지만, 아버지는 ‘네 동생’이라고 했다. 바리새인들은 죄인들과 이방인들을 형제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유대인의 형제로 불렀다.
맏아들은 온 가족의 책임자로, 죽을 뻔했다가 살아온 동생이, 돌아왔음을 보고, 기뻐했어야 했다. 우리의 모습이,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는, 온갖 고난을 겪고 돌아온 동생에 대해, 냉정하게 대했다. 아버지가 의도하는 바는 이러했다. ‘애야! 들어가서 함께 즐거워하며 기뻐하자.’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그렇게 함이, 마땅하다고 일깨워주었다. ‘우리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버지가 기뻐하면, 아들도 기뻐해야 마땅한다. 시기 질투 속에서, 일종의 상처받고 있다면, 하나님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시험에 든 것이다. 첫째 아들이 시험에 든 이유는 무엇인가?
(1) 아버지 마음을 일지 못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 그 자체를 보았다. 그러나 맏 아들은, 동생이 가지고나간 재물을 보았다. (2) 자기와 동생을 비교했다. 혼자 있을 때는, 문제 없이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재산을 말아 먹은 동생이 돌아오자, 문제가 생겼다. 비교하자 문제가 생긴다.
제는 저렇게 사랑 받는데, 열심히 일한 나는 뭐야? 여기서 시험이 빠진다. 그동안 맏이는, 자기는 아버지의 뜻대로 충실하게 살았다, 나는 옳게 살았다는, 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왔을 때, 의가 상급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오히려 동생이, 의롭게 되는 꼴을 본 것이다.
아버지는 생명을 소중히 여겨서, 죽은 자를 살리는 분이다. 그러나 맏아들은, 생명을 놓쳤다. 둘째 아들은 죽었다 살아났고, 생명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긍휼을 놓쳤다. 생명을 놓치면, 은혜를 누릴 수 없다. 생명을 놓치면, 은혜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구원받음은,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의 대가가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품기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부어준다. 스승이나 통치자의 마음을 붓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부어서, 우리에게 사역을 하고 감당하길 원한다.
그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한없는 사랑과 용서로, 우리를 품으신다. 그런 마음을 우리가 품을 때, 행복하고, 하나님의 의를 맛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형제들이다. 형제들 사이에 화목하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인,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따라서 세리와 죄인들이,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가까이 하려는 예수님을 보고, 비난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이,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정말 기쁜가? 믿던 친구가, 세상으로 빠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픈가?
나보다 늦게 믿고, 나보다 교회에 늦게 등록한 사람이, 더 많은 일과, 큰일이 맡겨질 때, 격려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내 안에는 이미, 형의 태도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형은 아버지 곁에서, 성실하게 일했기에, 형의 불평은 일리가 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러나 맏아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랑과, 은혜가 없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일을 참 잘하고, 지식적으로도 많이 알고, 경험도 있다. 그런데 그 주위에, 사람이 없다. 그가 말하는 것은 다 맞는 것 같은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정이 떨어진다.
자기는 잘 알고, 잘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니까,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한다. 한 마디로 성실하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데, 사랑이 없다면,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나는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고,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
이전글 : 2015년 5월 10일 - 아버지와 아들(눅15:11-24) | |
다음글 : 2015년 5월 24일 - 맥추감사의 의미(레23:15-22) | |
이전글 다음글 | 목록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