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5년 5월 10일 - 아버지와 아들(눅15:11-24)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5-0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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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눅15:11-24)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다. 본문에는 보통 사람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크고 깊은 사랑을 가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집을 나간 아들보다, 더 마음이 아픈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과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느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1. 아버지를 떠난 아들(11-12).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찾아와서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요청에, 유산을 나누어주었다. (신21:17)에 따르면, 재산을 상속할 때, 장자는 2/3, 차자는 1/3을 주도록 규정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버지가 유언장을 써서, 재산을 상속인에게 물려줄 수도 있고, 생전에 재산을 선물형식으로,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재산 처분권이, 아버지에게 있었기에, 그 유산을 아들에게 나누어 주어도, 아버지가 죽기 전에는, 그 재산을 임의로 처리하지 못했다.
(13-14)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둘째 아들은 재산을 분배 받은 지, 며칠이 못 돼서, 재물을 모두 모아, 먼 나라로 떠났다.
재산을 처리하여, 아버지의 간섭을 받지 않는, 먼 나라로 갔다. 따라서 받은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한 아들은, 아주 무례한 행동이다. 이런 계획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고, 오래 전부터 계획되었다. 먼 나라로 떠난 이유는, 부모님의 통제를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허랑방탕한(아소토스, 낭비적으로, 방탕하게) 삶을 살면서, 모든 재산을 날려버렸다.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날려버린 이유는, 그의 계획과 생각이, 쾌락에 치우쳐 있었다는 말이다. 그의 꿈은, 세상의 유혹 앞에서, 모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를 떠난 순간부터, 아버지로부터 해방되는 대신, 죄의 종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언급된 작은 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쾌락을 위해 사용한 세리나, 죄인들을 상징한다.
둘째 아들이, 재산을 모두 잃어버린 후,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다. 나라 전체가 흉년이 들었다. 그래서 부족함 없이 살았던 작은 아들은, 극도의 궁핍하게 살게 되었다. 이 모습은 죄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죄는 도둑질, 살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려는, 의지에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으로, 통제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서, 마음대로 살면, 행복해진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삶이, 매우 이상적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 살면, 즉시 죄의 세력에 붙잡히고 만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재능과 시간과 재물을, 이기주의와 쾌락에, 낭비해버린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가치 있게 사용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은, 이기주의와 쾌락을 좇아, 가진 것을, 쉽게 낭비한다. 하나님을 떠나 살면, 행복할 줄 알았던 생각이, 환상에 불과했음을 깨닫고, 영혼 깊은 내면에 극심한 영적 기아상태를 느끼게 된다.
2. 굶주리는 아들(15-16).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둘째 아들은, 모든 재산을 쓰고, 굶게 되자, 양식을 얻기 위해, 종이 되었다. 주인은 그에게 돼지를 치게 했다. 유대인은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해서, 가까이 하지 않았다(레11:7, 신14:8). 그러나 이국땅에서, 먹을 것이 떨어진 작은 아들은, 상황이 어려워지자, 부정한 삶을 살게 되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지만, 그것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쥐엄 열매는 ‘침례요한의 떡’이라 불렀는데, 침례요한이 광야에서, 이 열매를 먹었다고 전해졌기 때문이다. 쥐엄 열매는 약간 달다. 주로 가축사료로 사용되었고, 흉년에는 가난한 사람의, 식량 대용으로 사용되었다.
쥐엄 열매조차 얻지 못한 작은 아들은, 허기를 채울 수 없었다. 마침내 그의 상황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갔다. 그는 한 때 돈을 뿌리면서, 허랑방탕하게 살 때, 사람들이 몰려들어,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돈이 떨어지자, 따르던 사람들은, 다 등을 돌리고 떠났다.
사람들에게 소외되어, 굶주리며 사는 신세가 되었다. 쥐엄 열매를 주는 자가 없었다는 말은, 매우 흉년이 심해서, 아무도 그에게 동정을 베풀, 여유가 없었다는 말이다. 짐승 같이, 아니 짐승보다 더, 비참하게 살았다는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신앙생활에서 흔히 체험할 수 있다.
성도가 예수님과, 하나님 말씀을 떠나 살면, 죄의 노예가 되어, 짐승보다도 못한 삶을 살게 된다. 그때 그들이 사랑하던 세상은, 냉정하게 돌아서고 결국은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는, 비참한 상황이 된다. 이러한 고통은 성도들에게, 새로운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고통을 통해, 하나님 안에 사는 삶이, 얼마나 큰 복인지, 결국 깨닫게 된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잘못을 뉘우친다.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극심한 고난으로, 아버지를 떠난 행동이, 얼마나 미련한 일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집에,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많음을 기억했다. ‘스스로 돌이켰다.’는,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품꾼보다, 더 어렵게 살면서, 굶어죽기 직전 깨달았다.
그는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하자, 비로소 자기 행동이 얼마나 미련했는지, 잘 알게 되었다. 차라리 그 곳에서 사느니,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의 품꾼이 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생각을 돌이키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그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보면, 얼마나 풍요로운지, 깨닫게 된다. (18-19)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마침내 둘째 아들은, 먼 나라와 작별하고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일어나’는 곧 출발하겠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강조한 말이다. 참된 회개는, 마음의 변화와 함께, 의지에 변화가 수반되어야 하며, 그 생각이 행동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은, 그가 회심한 후에 했던, 최초의 결단이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다.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어서, 대신 하늘이란 말을 사용했다.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동시에 죄를 지었다고 인식했다.
생전에 유산을 요구하여, 먼 나라로 가서, 제멋대로 살며, 재산을 다 잃었다.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이었다. 참된 회개를 하는 사람은, 변명하기보다, 자기 죄를 스스로 자백하게 되어 있다.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알맞지 않다, 합당하지 않다.’는 말이다.
둘째 아들은 법적으로, 도덕적으로는, 더 이상 아들의 자격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받아, 모두 써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아버지에게 요구할 것이 없었다. 그는 아버지를 버렸으며, 이로 인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 돌아가, 아들이 아니라 품꾼으로, 써 달라고 했다. 여기서 품꾼은, 일시적으로 고용된 사람, 날품팔이를 의미한다. 이전에는, 아들의 자격으로, 당당하게 자기 분깃을 요구했지만, 모두 잃어버리자, 더 이상 아들의 자격을 요구할 수 없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아버지의 처분을 기다리기로 했다. 겸손한 태도는 참된 회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죄를 범한 인류는 자기 공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 따라서 자기 죄를 시인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다. 가난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3. 용서를 비는 아들(20-21).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그는 아버지께 돌아기로 결심한 후, 즉시 행동에 옮겼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의 생각은, 둘째 아들의 생각과는 달랐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집을 떠난 뒤에도, 계속 그를 사랑했다. 날마다 작은 아들을 기다리면서,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어느 날 아버지는, 멀리서 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보았다. 그 모습은 초췌하고,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이러한 작은 아들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측은히 여긴다.’(스플랑크니조마이)는 ‘도와주지 않으면, 도저히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 없는 마음 상태’를 말한다. 아버지는 급히 달려가, 아들의 목을 안고, 냄새나는 입에 입을 맞추었다. 동양에서는 아무리 급해도 나이 많은 아버지는, 품위가 있기에, 달려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 비유에 나온 아버지는, 자기 품위가 떨어지는 것을, 전혀 문재 삼지 않았다. 아버지가 먼저 아들에게 달려감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람은 죄를 지은 후, 천천히 하나님께 돌아가지만, 하나님은 회개한 인간을, 신속하게 영접해 준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입을 맞춤은, 무조건적 용서를 의미한다(삼하14:33). 이는 돌아온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 용서했음을 보여준다. ‘너 무엇 하다가, 이제 왔니? 네 꼴이 무엇이냐?’고 책망하지 않았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관대한 환대를 받고, 아버지가 자신을 용서했음을 깨달았다.
양심의 가책으로, 그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자신을 아들로 받아달라고, 요청할 면목이 없어서, 아버지께, 품꾼으로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이 장면은, 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죄인과, 뜨거운 사랑으로 용서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자신의 반역과,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종으로라도 받아달라고 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 죄와 무가치함을 인정하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은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는 사람을, 모든 죄를 용서하고, 큰 자비로 받아준다. 여기서 아버지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어떤 마음인가?
(1) 용서하고 회복시켜주시는 아버지(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품꾼으로 써달라고 요청하는 작은 아들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아들의 요청을 듣지 않았다.
아버지는 즉시 종들에게 명해서, 제일 좋은 옷을 갖다가, 아들에게 입히도록 지시했다. 아버지는 모든 재산을 향락으로 날려버린 아들을, 극빈으로 모셨다. ‘제일 좋은 옷’은, 그 집에 있는, 가장 귀한 옷이다. 그의 죄를 다 용서하고, 다시 아들로서 인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2) 아버지는 종들에게, 가락지를 가져다가, 작은 아들의 손에 끼우라고 했다. 당시에 반지는, 자신의 권위를 대신하는 인장이었다. 그러므로 작은 아들에게, 가락지를 끼운 것은, 아버지의 권한을 위임한 것이다. 아버지를 반역하고, 자기 유산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상속자의 권위를 인정해 주었다.
(3) ‘신발을 가져다가, 작은 아들에게 신기라.’고 했다. 당시에 종은, 신을 신지 못했다. 먼 나라에서 모든 재산을 다 잃고 돌아온, 작은 아들은 종이 되었기에, 맨발로 돌아왔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죄의 종이 되어,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신을 신겨서, 자유인이 되게 해주셨다.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하고,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켜 준다. 돌아온 아들에게, 옷과 가락지와 신발을 준 것처럼, 돌아온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준다.
(4) 이웃과 함께 즐거워하는 아버지(23-24).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기쁨을, 이웃과 나누기 위해, 큰 잔치를 열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자, 잃었던 아들을 찾은 기쁨이 커, 이웃과 기쁨을 나누기를 원했다. 원문은 ‘송아지’ 앞에, 정관사 ‘톤’이 있다. 이는 준비된 송아지임을 보여준다.
당시 유대인들은 귀한 손님이 오거나, 특별한 때가 되면, 자신이 키우던 짐승 중에서, 가장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손님을 대접했다.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바리새인들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죄인들을 용납하는 예수님을,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잃은 영혼을 찾음을 보고, 기뻐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열고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보고,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나고, 잃어버렸었던 아들을, 다시 찾은 것처럼 크게 기뻐했다. 어떤 사고로, 자녀가 죽으면, 그 부모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괴로워한다. 이런 경우에, 만일 그 아들이 다시 살아난다면, 부모님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죄인 하나가, 하나님께 돌아올 때에, 하늘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진다(7.10).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영혼을 책망하거나, 처벌하지 않고, 자녀로 받아준다. 따라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일을, 주저할 필요가 없다. 돌아오는 죄인들을, 무조건 용서해 주고, 잃었던 모든 권세를, 즉시 회복시켜 준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온 하늘이 함께 기뻐한다.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눈 것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한 영혼이 돌아오면, 하나님은 성도들과, 천사들과 함께 기뻐한다.
만일 바리새인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죄인을 용납하는 예수님을 보고, 비난하지 않고 기뻐했을 것이다.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잃은 영혼을 찾음을 보고, 감사하며 기뻐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에 자비가 없었기에, 예수님이 죄인을 가까이하는 보고, 비난하고 불평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로,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우쳐 주셨다. 부모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효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들고, 육신의 부모님의 마음을 알아서, 효도하는 성도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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