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41013 숨은 위인 오바댜(왕상18:3-15) | |
작성자 : 윤성은 | 작성일 : 2024-10-23 |
첨부파일: 숨은 위인 오바댜(주일).hwp(89K) |
(3-4)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언뜻 보면, 역사는 소수의 영웅적인 존재들로, 이루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사의 전면에 크게 드러나지 않은 믿음의 사람들도 많다. 그 대표적 인물이 오바댜다. (3)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12下)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오바댜’(오바드야후)는 ‘아바드’(종으로 섬긴다) + 야후(여호와) 즉 “여호와의 종이 되어서 섬기다.”는 뜻이다.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 선지자 100명을 보호하며 구한 사람이다.
아합은 이스라엘 왕들 중에서, 제일 악한 왕이다. (왕상16: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16:33)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이스라엘에는 아합 이전에도, 나쁜 왕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아합은, 이들과 비교되지 않는, 아주 악한 왕이었다. 한 마디로 악의 화신이었다. 오바댜는 이때 궁중의 살림을 책임진, 궁내 대신이다. 쉽게 말해 비서실장이다. 아합은 극악무도한 왕인데, 그 악독한 왕 밑에, 오바댜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했다. 신실하고 진실하게 살려는 사람이었다. 그는 왕궁에서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왕후 이세벨의 손에서, 여호와의 선지자들 100명을 구원해서, 굴속에 숨기고, 떡과 물을 공급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오바댜의 생명을 건 모험이었다.
1. 악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① 오바댜는 가장 악한 아합왕 밑에서, 자기 신앙을 굳건하게 지켰다. 지극히 어둡고 악한 환경이지만, 신앙을 지키며 살았다. 우리는 악한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기 어렵다며, 여러 이유를 대며 산다.
죄악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으면, 출세할 수 없는 세상인데, 살기 위해 적당히 눈을 감아주고, 모르는 척해야 살아갈 수 있다고, 핑계 대고 산다. 어떤 잘못된 문제를 말하면, 집단으로 덤벼드니까, 모르는 체하고, 입 다물고 살자고 한다. 이처럼 포기하고, 체념하며 살아간다면, 비겁한 행위이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신앙생활 잘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런 곳은 거의 없다. 그때 힘든 세상에서, 어쩔 수 없다며, 타협하며 고개 숙이고 살아간다면, 비겁하게 타협하면 안 된다. 세상에는 죄악이 넘치고, 선한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루터기 같은 의인은 있다.
모든 사람이 타락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도, 노아와 같은 의인이 있었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구원받았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죄악이 넘쳐나, 심판을 받을 때도,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심판을 면할 수 있었다. 이처럼 역사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감추어진 위인들이 많다.
엘리야처럼 앞장서서 싸우는, 영웅적인 인물은, 우리에게 모범이 된다. 너희도 이렇게 살라고, 그들의 삶으로 말해준다. 사무엘도 영웅적인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성전에 바쳐졌는데, 성전이 도둑놈 소굴과 다름이 없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성전에서 온갖 죄를 저질러, 범죄의 소굴이 되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어떤 실수도 하지 않은 모습으로, 깨끗하게 살았다. 이렇게 살라는 말이다. 그런데 악한 아합왕 아래서, 오바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며 살았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로 믿고, 그가 선 자리에서 묵묵히 섬기며 산다.
나의 지위와 나의 환경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나님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산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에4:14下)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했을 때, (16)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결단으로, 왕 앞에 나아감과 같다.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 유익만 위하여 살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오바댜가 자신의 안일만 추구했다면, 선지자들을 숨기는 위험한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성도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 자신을 헌신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묵묵히 헌신할 자를 찾고 계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사야 선지자처럼 (사6:8中)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듯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도구로, 쓰임 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 숨어서 살리는 사람(4-6).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② 오바댜는 숨어서, 살리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숨기고, 먹인 사실이 알려지면, 오바댜도 이세벨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오바댜는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했기에,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숨어서 구했다. 살리는 사람이 되었다.
오바댜는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 일백 인의 선지자들을 보호했다. 그는 말로만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바댜가 비록 궁중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높은 위치에 있었지만, 극한 가뭄의 시기에, 백 명이나 되는 선지자들을, 먹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일이 발각되면, 그는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는, 지극히 위험한 모습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과 재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위기에 처한 선지자들을 돕는 일이, 자기 사명이라 생각하고, 숨어서 활동했다. 물이 완전히 말랐을 때, 아합은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말들을 먹이는 일이 중요했다.
그래서 말과 노새를 살리려고, 물을 찾으려고, 자기는 군대를 이끌고 가고, 오바댜도 군대를 이끌고, 다른 방향으로 가게 만든다. 이처럼 그는 믿고 맡길 수 있는 인물이요, 중요한 요직에서, 왕의 신임을 얻어 활동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 이것도 위인의 모습이다.
비록 숨어서 활동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선지자들을 살리는 사명을 감당했다. 엘리야처럼 혜성처럼 나타났다, 번개처럼 사라지는 인물, 갈멜산에서 전투를 벌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뒤, 불말과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
또 오바댜처럼 현실은 어둡고 악하지만, 최선을 다해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백 명의 선지자를 위해, 3년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물과 고기를 제공했다. 엘리야 같은 사람이 한 명 필요하다면, 오바댜는 수백 명이 필요할지 모른다.
③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 명도 나온다. (왕상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았지만, 이들은 숨어만 사는 사람이었다. 안타까운 사람들이다.
내가 어떤 직분을 가지고 일하는가 보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누구는 목사로, 장로로 집사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일의 종류와 직위가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이,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며, 내게 주어진 사명을, 얼마나 최선을 다해, 감당하느냐가 우리의 과제다.
최선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나에게 맡기신 일을 열심히 할 때, 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때 하나님은,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맡긴다. 그 일만은 안 했으면 좋겠는데, 꼭 나를 불러서 그 일을 시키신다. 왜 이렇게 하실까?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부분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말은 억지로 하라는 말이 아니다. 좋아서 하는 일은, 좋은 감정이 사라지면, 그 일도 싫어진다. 그러나 사명으로 하는 일은, 일단 시작하면, 그 일이 좋아지고 보람을 느끼며, 주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된다.
오바댜는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현장을 떠나지 않고, 최선을 다해 감당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든 전혀 상관이 없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느 곳이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최선을 다하자.
3. 두려움을 이긴 방법(7-14).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그를 만난지라, 그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그러하다,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이르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나,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백 명을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그리하면 그가 나를 죽이리이다.” 오바댜는 두려워 떠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바댜가 길을 가다 엘리야를 만났다. 엘리야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오바댜는 그를 알아보고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하면서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자 엘리야가 그에게 “가서 아합에게 나를 봤다고 얘기하라, 내가 그를 만나, 담판을 지어야 할 일이 있다.” 하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하려 합니까?” 용기가 있다면, 엘리야의 손을 잡고, 왜 이제 나타나셨느냐?
잘됐다. 이제 당신과 나, 그리고 제가 숨겨둔 선지자 백 명이 있으니, 합쳐서 아합과 한판 싸우자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오바댜는, 내가 무슨 죄를 범했기에,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붙여 죽게 하느냐고 3번 말한다(9, 12, 14). 저가 나를 죽이리이다 하며, 죽을까 봐, 벌벌 떠는, 연약한 모습이다.
오바댜는 연약한 사람이지만, 그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에, 자신을 드렸다. 오바댜는 자신이 없는 그 부분에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 죽을까 봐 떨고 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잡아 죽이는, 바로 학정 속에서, 선지자 백 명을 굴에 숨기고, 먹여 살렸다.
죽음을 무릅쓰고 일했다. 무서워 벌벌 떠는, 나약한 인간이었지만, 인간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용기 있게 살았다. 자기 약점을 극복해야, 하나님의 일을 똑바로 할 수 있지만, 그는 두려워하면서도, 그 일에 최선을 다했다. 목숨 걸고 헌신했다. 용기 없는 사람이었지만, 용기 있게 살았다.
두려움이 없는 것은, 진정한 용기가 아니다. 간이 부은 것이다. “용기는 두려움 없는 마음이 아니라, 두려움이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사는 것이다.” 두려움을 어떻게 이길 수가 있는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18장의 핵심은 분명히, 갈멜산에서 영적 대결이다. 그 주인공은 엘리야가 틀림없다. 그러나 오바댜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크고 위대한 사건뿐만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평범하고 조용한 삶도 귀하게 여기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 갈멜산에서 하늘의 불을 내려, 단숨에 850명의 거짓 선지자를 진멸하시고,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셨고, 또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조용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목회하면서, 지금까지 저의 가슴에 뚜렷하게 남아있는 사람은, 엘리야처럼 화려한 전적을 자랑하다가 사라지는 사람이 아니라, 오바댜와 같이 드러나지 않게, 묵묵히 아름답게 헌신했던 사람들이 더 많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지만, 주님이 기억하고 인정해 주신다. 역사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결론이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 특별히 어떤 때, 잘 감당해야 하나? ① 환난이 극심할 때다. (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위험하고 환난이 심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일을 잘 감당하자.
② 기근이 심할 때다. (2)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③ 세상이 매우 어둡고, 썩었다고 생각할 때다. 아합왕 때에는, 매우 어둡고 썩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소금이라.” 했다. 빛은 어두울 때 가치가 있고, 소금은 썩어갈 때 가치가 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오바댜가 살고 있던 시대와 흡사하다. 노아 시대와 같고, 롯의 때와 같다. “교인들은 많으나, 참된 성도는 적다.” 이 세상이 죄악에 물들고, 흑암의 세력이 가득하다. 이때 우리마저 빛과 소금이 되기를 거절하고, 세상을 외면하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온 교회와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굳게 손잡고, 일어나기 빛을 발할 수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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