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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240929 기다림의 시간(왕상18:1-2)
  작성자 : 윤성은 작성일 : 2024-10-02
  첨부파일:   기다림의 시간(주일).hwp(91K)

  (1-2)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하나님을 향한 큰 열정과,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던 엘리야가, 그렇게 오랫동안 활동도 하지 않고, 숨어 지내야 했던 것은, 그로서는 견디기에 어려운 시험이었다. 그처럼 힘이 넘치고 용기 있는 선지자라면, 자기 민족이 겪는 어려움 가운데, 힘을 다해 활동하고 싶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기는커녕, 긴 시간 동안 철저하게, 숨어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 세상의 모든 것, 내 자존심, 논리, 뜻과 철학을 단절해야 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훈련을 받았다.

  또한 사르밧에서, 계속 인내하며, 반복되는 훈련을 받았다. 인간적인 요소를 녹여내는 용광로 훈련,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면, 하나님이 책임지는, 놀라운 역사를 배웠다. 정말 가슴이 아플 때, 내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며, 원망 불평을 하지 말고, 멸시 천대에도 기도해야 함도 배웠다.

  이처럼 성경에는, 사람과 사건에 관한 내용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를 ‘역사서’라고 한다. 약 40% 정도가, 역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면 왜 역사 이야기를, 성경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셨을까? 크게 2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등장인물들을 통해 교훈을 얻는다.

야곱이 어떻게 살았고, 모세가 어떤 일을 했고, 다윗이 어떤 죄를 범했는가, 이런 말씀을 볼 때, 우리는 “아, 저렇게 살아야겠다. 저런 짓을 하면 안 되겠다.” 하는 교훈들을 얻는다. 삶을 통해 배운다.

② 인물과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알려주신다.

성경은 하나님이 성취하시는, 역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특정 사건에,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지 않아도, 거기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읽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성경이, 바로 에스더서다.

  에스더는 하만과 모르드개, 에스더, 세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박하고 통쾌한 역사다.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지만, 에스더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고, 하나님이 어떻게 그분의 백성을 위협하는, 악의 손길에서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 준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이다. 엘리야의 생애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엘리야를 통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살펴볼 수 있다. 본문은 사르밧이라는 활동무대를 떠나, 새롭게 전개되는, 2막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오는 일종의 삽입절이다. 많은 날이 지나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다.

1.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많은 날을 지내고, 제3년에”는, 엘리야가 3년 동안 사르밧 여인의 집에 머물렀다는 말이다. 3년은 엘리야에게는 훈련기간으로,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때는, 사람이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 기다려야,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 기다려야 성취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3년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30년일 수 있다. 성경을 보면, 사람마다 그 시간이 다르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약속받은 다음, 실제로 이삭을 낳기까지, 25년의 세월이 있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다시 벧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만나기까지, 22년간의 외롭고 힘든 타향살이로 고생하며 보내야만 했다. 모세는 40년을, 애굽의 궁정에서, 자신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또 이스라엘 사람에게 외면받고, 또 다른 40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외로움과 시련을 견디며, 싸워야 했다.

  80년의 긴 세월을,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때까지 기다렸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 기다려야만 이루어진다. 엘리야는 3년 동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훈련을 받았다. 하나님은 절대로 서두르지 않는다. 하나님의 정확한 시간에, 하나님의 계획대로 일하시니, 기다려야 역사가 이루어진다.

  근육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훈련 과정을, 견디고 견디는 과정에서 생긴다. 반복과 지속을 통해 생긴다. 근육이 잘 형성되면, 우리는 인내할 수 있고, 끈기를 가지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와 지혜가 필요하다.

  엘리야도 마찬가지다. 엘리야가 사르밧 여인의 집에 있을 때, 그 집에 가루가 마르지 않고, 기름이 기름병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는 능력이 나타났다. 죽은 아들을 기도로 살려냈다. 이때 엘리야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이럴 때 보내시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체험으로만 하는 일이 아니다. 큰 은혜를 체험하고 나면, 흥분한다. 흥분하면, 성급하게 뛰쳐나간다. 대단한 열심을 보이지만, 그러한 열정은 위험하다. 큰 체험을 한 후에는, 반드시 그것을 소화하고,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더 준비해야 한다.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예수님께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한다.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뿌리 깊은 나무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기다림을 통해서, 어떤 환경에서도 요동하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오래 엎드린 새가 높이 날고, 먼저 피는 꽃이, 지는데 빠르다.” 오래 엎드리지 않고, 높이 나르려고만 하기에, 쉽게 쓰러진다. 자기의 능력과 영성을 채워야 한다. 소양강 댐도 처음 3년은, 물이 차기까지는 물을 내려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격과 인격을 갖출 때까지, 영적 근육을 든든히 키워야 한다. 하나님의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실 때까지이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가라’고 할 때까지 기다렸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까지 기다렸다.

2. 절대 순종의 자세를 배워라(2).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1下)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합에게 보이려고 갔다.

  당시로 돌아가 보자. 엘리야가 아합에게로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는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이던, 살벌한 시대였다. (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특히 아합은 엘리야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10中)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이런 상황에 있었던 엘리야는, 그 옛날 애굽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모세가 그랬듯이, 위험을 내세우며 이를 회피할 수도 있었고, 또 요나처럼 도망갈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즉시 아합을 만나러 갔다. 이를 통해 갈멜산의 위대한 승리가, 엘리야가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났다. 그런데 우리는 아골 골짝에도 가고, 땅끝까지 가서, 복음의 증인이 되겠다고 찬송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주저앉는다.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기는커녕, 교회에서 목장을 맡는 일에도, 쉽고 편한 곳을 찾는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려고, 천국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낮은 땅으로 오셨다. 이 사실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곳이, 그 어느 곳이라도, 주저 없이 달려가야 한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신앙생활을 똑바로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내 계획과 내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인내해야만 이루어진다. 기다림의 교훈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는, 정말 조급한 시대요, 기다릴 줄 모르는 시대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빨리 이다. 여행을 가도, 차에서 빨리 내려, 사진 찍고 빨리 떠나니까, 우리나라는, 감상문화가 부족하다고 하고, 박물관이 비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고 한다. 평소 모습이 이렇다 보니, 신앙생활도 참고 기다리는 여유 있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

  기도해도, 당장 하늘에서 응답이 떨어지기를 바란다. 전도도 한번 해 보고, 전도 대상자가 믿으려는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에게 다시 전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기다리는 성품과 훈련이 필요하다. 기다림이 없이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님이 정하신 특별한 때가, 언제인지 모른다. 하나님만이 아신다. 우리는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이 없이, 어떻게 열매가 맺힐 수 있는가? 어제 씨를 뿌렸는데, 오늘 열매 맺는 과일이 있는가? 어제 임신했는데, 오늘 태어나는 아이가 있겠는가? 최소한 8달은 지나야, 출산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기다려야 하는 과정과,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질 수 없다. 죄인이 하루아침에 성자로, 확 바뀌는 일은 없다. 죄인이 성자로 바뀌려면, 반드시 하나님이 일하시는 과정과, 정하신 때가 있다.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면서, 그 과정에서 침묵과 기다림의 영성으로, 주님께 모두 맡기는 신앙생활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다. 야고보는 오늘은 핍박과 박해, 내일은 순교, 오늘은 화형대, 내일은 사자 밥이 되는, 아주 절박한 상황 속에 살아가는, 초대 교회 성도들이기에, 주님의 강림을 간절히 원했다.

  그때 이렇게 권했다. (약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우리는 주님이 언제 강림하실지 모른다. 벌써 2천 년 전에 말씀하신 그 말씀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하나님의 역사, 언제 우리 앞에 펼쳐질지 모르는, 주님의 때와 섭리를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자세를, 사르밧을 떠나는 엘리야에게서 배울 수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기다릴 줄 아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하루아침에 좋은 교회, 부흥하는 교회가 될 수 없다.

3. 기다림의 3년은, 믿음을 증명되는 시간이다(1下.)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가라”고 명령하시며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고, 선포하라고 하셨다. 그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① 비를 내리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분명히 보여 주는 사건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겼다. 바알은 풍요의 신이요, 당시 농경문화 속에서, 풍요는 비와 관련이 있었다. 사람들은 바알이 비를 내려서, 농사가 풍작이 들게 한다고, 믿고 섬겼다.

  그런데 (17:1下)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않으리라.” 선포하여 극한 가뭄으로 사람들은 고통당했다. 그러므로 3년의 기근은, 바알 신의 무능력이 철저히 노출되었다. 하나님은 3년의 기근으로 고통당하자, 바알을 믿고 따라도, 도움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풍요를 좇아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그들이 쫓고 있는, 풍요의 신이 자신을 행복하게,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진정한 행복과 풍요는, 주님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하려고, 다시 엘리야를 아합왕 앞에 서도록 했다.

  오직 우리 하나님 한 분만, 진정한 풍요와 행복의 근원이 되신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항상 엉뚱한 곳에서, 그리고 기껏해야 표면적인 것에서, 풍요와 행복을 찾아왔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 어느 것도 온전히 얻을 수 없으며, 또 이런 것들을 손에 넣었다고 해도, 결코 진정한 행복을 얻지는 못한다.

  (사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하나님을 떠난 자에게는, 진정한 행복과 평강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고, 그분으로 인해 얻는 만족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눅4:25-26)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예수님은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를 말씀하셨다. 왜 말씀하셨나?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고향 사람을 비롯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했기에, 그 예로 들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으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사르밧에서 이루어졌던 일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거부나 방해, 인간의 한계로 중지되지 않는다. 새로운 믿음의 현장, 믿음의 사람들을 향해, 계속 옮기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복을 누리지 못하면, 당신의 역사를 이룰 새로운 곳으로 옮겨서, 하나님의 역사를 새롭게 이룬다.

  이스라엘에 구제할 과부는 많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하나님의 역사를 성취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시돈 땅에 있는, 그 가난한 여인은, (17:24)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갔다.

  그 일을 위하여, 엘리야는 3년 6개월 동안, 거기에서 사역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위해, 갈멜산의 결투를 미루셨다. 축복을 누리지 못하면, 촛대는 옮겨질 수 있다. 하나님의 역사를 계속 감당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촛대를 옮기실 수 있다. 그러면 부흥의 불길은, 점점 꺼져가게 된다.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으로 굳게 서자. 구원과 생명의 주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자. 또 사명과 축복의 촛대가, 우리에게서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불행을 막자. 하나님! 우리를 거룩하게, 귀하게 계속해서 써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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