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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240804 억지로 진 십자가 복(눅23:26)
  작성자 : 윤성은 작성일 : 2024-08-17
  첨부파일:   억지로 진 십자가 복(주일).hwp(88K)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에 대한 태도에 따라, 그 사람이 멸망하기도 하고, 구원받기도 한다. 따라서 십자가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십자가를 모르면, 예수님을 알 수 없고, 기독교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도 알 수 없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다. 왜 세상이 더 어지럽고 혼란해지나? 인간이 중심이 되어, 십자가를 제외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증인이 되는 일이다. 그런데 믿는 성도들도, 십자가의 의미가 점점 더, 퇴색되어 가고 있다.

  요즘 십자가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십자가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기에, 세상 사람들이, 더 많이 사용한다. 어느 지방에 교회와 절이 나란히 있었다. 보통, 절은 조용한데, 교회는 시끄럽다. 교회에서 열심히 찬양하자, 그 소리가 다 절로 넘어가 들렸다. 그래서 절에서 야단났다.

  승려들도 지지 않으려고, 불경을 외우는 목소리가, 덩달아 커지게 되었다. 그래서 주지승이, 승려들을 모두 모아 놓고, “누가 교회에 가서, 너무 시끄러워 염불이 자꾸 헷갈리니, 제발 조용히 하라고 해라. 누가 갔다 올래!” 했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교회에 가서 말하는 것이, 그렇게 두려우냐?”라고 하자, 그때 한 동자승이 일어나, “주지 스님, 제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라고 했다. 지금까지 십자가는 기독교 용어로, 기독교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치인, 깡패, 심지어는 절간에서도, 십자가를 들먹이는 세상이 되었다.

1. 십자가는 무엇인가?

십자가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시작됐다. 국가 반역죄에 해당하는 사람을, 매달아 죽이는, 아주 끔찍하고 잔인한, 사형법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로마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후부터,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다. 십자가는 무섭고 끔찍하고 잔인한 형벌이다.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이다.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만 아니라, 부끄러움의 상징이다. 이방인들은 십자가가, 부끄러움의 상징임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님이 고난받는 장면은, 복음서에 나타난다.

  그러나 대부분, 육체적인 아픔보다, 정신적인 아픔, 즉, 조롱, 멸시 천대, 창피로 인한 고통을 묘사한다. 수치가 고통보다 참기 어렵다. 사람은 아픔은 참아도, 부끄러움은 참기 어렵다. 죄의 심판은, 부끄러움에서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얼굴에 침 뱉고, 뺨을 때렸다. 머리를 흔들었다.

  네가 정말 메시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을 구해보라고 놀림을 받는다.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조롱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기독교가 십자가를 전하기 때문이다. (신21:23下)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가 어떻게, 메시아가 되냐며 믿지 않는다. 그런데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해, 저주를 대신 받은 십자가라 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받고, 철저히 심판받았다. 모든 인류의 죄가, 십자가 위에서 심판받고 해결되었다. 주님이 당한 수치와 고통은, 인류가 죗값으로 당하는,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께 대한 감사와, 죄에는 무서운 심판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죄를 짊어지시자, 죽을 수밖에 없었다. 죄는 그만큼 무섭고, 반드시 심판을 당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서, 우리는 죄를 용서받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 휘장은 담과 같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이 있었지만, 그 담이 무너졌다. 예수님의 몸이 찢어지면서, 하나님과 나 사이의 휘장이 찢어졌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엡2:16)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자, 성소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고, 무덤이 열리면서, 죽은 자들이 살아났다(마27:51-52). 이는 부활에 대한 예시다. 십자가는 죽음이요, 부활의 능력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기 전까지, 사망이 권세를 가지고 있었기에, 모든 인류는 다 땅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사망의 결박이 다 풀렸다. 사망의 권세를 꺾으심으로, 부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죽음에 대한 종말 선언이다. 십자가를 붙들 때, 사망 권세가 물러나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주변에는, 많은 십자가가 있었다.

2. 십자가의 종류

(1) 저주의 십자가, 사망의 십자가가 있다(33中).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가 있다. 그 당시의 십자가 처형은, 가장 악독한 사람들을 본보기로 죽였다. 유대인의 율법이 아니더라도, 두 행악자는 천국을 감히 바라보지도 못할 사람들이다. 십자가에서 숨이 끊어질 때까지 달려 있다가, 새와 짐승에게 다 뜯어먹히고, 죽어야 할 강도들이다.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한 강도는 십자가에 달렸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았다. 그가 십자가 아래서의 삶이야 어떻든지, 마지막은 진실해야 하고, 회개하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죄 없으신 예수님을 비방했다.

  조롱하며,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그 기도를, 강도들은 들었다. 그들은 자기 죄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고 있으니, 그들 마음은 녹고, 그 사람에 대한 존경심과 감동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조롱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비방한 그는, 결국 저주의 십자가를 지고,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갔다.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는 있었지만, 기회를 놓치면 멸망의 십자가다. 지금도 구원의 예수님을 소개받고도, 영접하지 않는 분들이 있다. 이들은 자기 죄로 지는, 저주의 십자가이다. 지옥 불을 면치 못하는 사람이다.

(2) 회개의 십자가, 용서받은 십자가, 구원받은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다른 행악자는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 하소서.”라며, 예수님께 구원을 간청한다. 그도 처음에는, 다른 강도와 함께 욕했다(마27:44).

  그러나 자신의 죄를 보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깨달았다(40). 자신은 죗값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알았다. 그러나 옆에 계신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심을 알고, (41)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구원을 요청하였다(42).

  주님은 그의 믿음을 보고 (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면서, 그의 간청을 들어 주셨다. 그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고, 구원받았다. 무엇으로 구원받았나? 그의 선한 행위가 아니었다. 그는 주님을 위해, 냉수 한 그릇도, 떠 드린 적이 없다.

  그의 손이 못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발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 발도 옮기지 못했다. 두 발은 못 박혔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하지 못했지만, 구원을 받았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세주요 주님으로 받아들이면 구원받는다.

(3) 구원의 십자가, 죄 사함을 주시기 위한, 십자가가 있다(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신의 죄가 아닌,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죽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들 한 가운데 서 있다.

  예수님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심한 고통, 갈등, 괴로움, 수치의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 위에서 (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용서의 십자가이다.

  예수님이 용서해 주어야 할 대상은, 사방에 있던 자들이다. 모두 죄인으로 원수였고, 원수처럼 행동했다. 바리새파, 사두개인, 로마 군병, 지나가던 행인, 십자가에 달렸던 죄수, 심지어 제자들도 다 배신하고 도망갔다. 모두 미운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용서의 기도를 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대할 때, 우리도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오늘 이 구원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자. 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런 복이 있기를 바란다.

(4) 사명의 십자가, 내 몫의 십자가가 있다(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갈 때, 구레네에 사람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되었다. 시몬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함께 골고다까지 올라갔다. 이 십자가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십자가요, 사명의 십자가이며,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다.

  그런데 우리는 괴롭고 힘들다면서,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았는가? 예수님은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가 아니라 무리이다.

  무리는 자기 필요로, 주님을 따라다니다가, 자기 욕망과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어떤 십자가든, 달게 지는 사람이 있는가? 없다. 누구나 다 십자가는 꺼린다.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다.

  그러다 보니까, 본회퍼가 지적한 대로, ‘값싼 은혜’만을 추구하는, ‘값싼 신자’들이 되어간다.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다. 씨 뿌리는 수고가 없으면, 추수의 기쁨도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선택이 아니다. 십자가가 있어야, 영광과 상급이 있고, 진정한 기쁨이 있다.

  십자가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지면 좋겠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는 잘 안된다. 그러면 자원하는 마음이 없다고, 아예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다. 억지로라도 저라. 사명의 십자가에는, 공짜는 없기 때문이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졌기에, 많은 복을 받았다. 어떤 복을 받았나?

3. 억지로 지었던 십자가의 복

(1) 하나님께 쓰임 받는 복이다(막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교회 역사 가운데,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아니라, 이방의 안디옥 교회다. (행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 교회에, 여러 선지자와 교사들이 있었다. 그중 니게르 시므온은, 니게르는 ‘검다.’는 라틴어다. 시므온과 시몬은 똑같은 이름이다. 구레네 시몬은 그 후, 안디옥 교회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구레네 사람 루기오는, 구레네 시몬의 동네 사는 친구에게 복음을 전해서, 교회 리더로 쓰임을 받았다.

  이처럼 억지 십자가를 졌는데,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 주님의 일은 자원해서 하면 좋지만, 때로는 억지로라도 해야 한다.

  (눅5장)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잡은 것이 없어, 그물을 씻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셨다. 억지로라도 순종했다. 그 결과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고, 다른 배의 동무들에게 도와달라고 하니,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다.

  또 베드로는 예수님께, 사람을 취하는 종으로, 쓰임 받는 존재가 되었다. (요11장)을 보면,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대 지방으로 가자 하자, 제자들은 불평한다. (8)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그들은 가기 싫은 길을, 억지로 끌려갔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일생 놀라운 경험을 한다. 억지로라도 복종하니까, 이런 축복의 자리에 서게 되는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2) 온 가족을 구원했다(막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가 시몬이다.

  (롬16:13)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 시몬의 아내는 예수님을 믿고, 얼마나 헌신하는지, 바울이 그를 어머니로 불렀다.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이런 고백을 하는 분들이 있다. 거절할 수 없는 관계 때문에, 강제로 끌려와서 구원받았다.

  당시에는 억지였는데, 구원받은 후에는 너무 잘했고, 나를 이끌어준 사람이,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 그러므로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져라. 자원해서 기쁨으로 하면 더 좋겠지만,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져라. 억지라도 십자가를 지면, 복이 온다. 이런 복이 우리에게 넘쳐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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