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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240714 안식과 복(창2:1-3)
  작성자 : 윤성은 작성일 : 2024-07-17
  첨부파일:   안식과 복(주일).hwp(92K)

  (1-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암세포는 자기 조절 능력을 잃어버린 세포다. 쉴 때는 쉬고, 번식할 때 번식해야 하는데, 쉬지 않고 계속 자기 번식을 시켜, 결국 생명에 타격을 주어, 죽게 만든다. 인간의 생명을 생각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번영만을 추구하면, 몸은 반란을 일으켜, 암세포가 되어, 파멸을 가져온다.

  사람이 성실하고 똑똑해도, 쉴 줄 모르고, 일만 하면, 세상을 떠나기 쉽다. 이 세상에는 일벌레 같은 사람들이 많다. 쉬지 않고 일하면, 외적으로 성공할 수 있지만, 내적으로 행복하지 못하다. 몸이 반란을 일으켜, 병을 얻게 되기에,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안식하라, 휴식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한 후에 안식했다. 安息은 ‘편안할 안, 숨 쉴 식’이다. 편안히 숨을 쉰다는 말이다. 히브리어로는 “솨바트”라고 한다. 유대인 신학자 마르던 바는, 솨바트(일을 그치다, 쉬다, 받아들이다, 향연(축제)하다.”로 4가지로 해석했다.

  사람은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일을 그치고 쉬어야 한다. 왜 하나님이 쉬셨을까? 사람은 피곤해서 쉬지만, 하나님은 피곤하기에 쉬지 않았다. (1-2)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이 쉰 이유를, 한 가지 동사로 말한다. ‘이루어지니라’ ‘마치시니’는 똑같은 단어(칼라)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다 이루셨기에 쉬셨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쉬셨다는 말이다. 우리도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쉬어야 한다.

1. 하나님께서 안식하심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은 창조하신 만물을, 돌아보아야 하는 섭리가 있다. 하나님은 지나간 엿새 동안의, 창조 사역을 돌아보시며 즐거워하셨다. 이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자축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① 그리스도인의 안식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바라보며, 즐기며, 감사하는 시간이다. 그리스도인은 안식하며,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바라보고, 즐거워해야 한다.

② 구원에 감사하는 시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 도착했을 때, 그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왔다. (출14:11)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라면서 소리쳤다.

  (14:13上)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제자들에게 잠시 길을 멈추고, 공중의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고 했다. 계속 “보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하셨다(신5:12).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과 일하심을 보아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깊이 생각하며 바라볼 때, 찬양이 나오고, 감사가 나온다.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신령한 세계가 열리게 된다.

③ 하나님의 품에서 행복을 받음이다. 사람은 너무 바쁘면, 늘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게 된다. 세상을 불평과 원망의 눈으로 본다. 그러나 쉼을 갖게 되면,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 안식의 완성은 요한계시록에서 볼 수 있다. 안식이란 말은 나오지 않지만, 진짜 안식하는 모습이다.

(1) 안식은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재를 쉬면서, 미래를 새롭게 만든다.

우리는 일할 때, 에너지를 소모한다. 에너지가 소모되면, 에너지를 충전해야, 다시 앞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안식을 통해, 육체와 정서와 영적 회복을 해야 한다.

  안식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요 ‘명령’이기에, 인간에게는 ‘의무’이며, 열심히 일한 자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오늘 우리 시대는, 안식을 잃어버렸기에, 안식을 되찾아야만 한다. 자동차왕 포드는 “일만 하고 휴식을 모르는 사람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같이, 위험하기 짝이 없다.”라고 말했다.

(2) 휴식과 안식의 차이는 무엇인가?
컴퓨터 화면을 오래 보면, 눈이 피로해진다. 이때 두 눈을 감는 것은, 안구가 노동을 잠시 쉬는 것이고, 창밖이나 먼 산이나,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눈의 초점을 잡는 기능은, 회복시켜 주는 안식이다.

  현대인의 생활 속에, 휴식하려는 사람은, 아침잠에 투자하고, 안식하고자 하는 사람은, 새벽을 깨워,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에, 투자하게 된다. 예수님도 휴식하셨기에, 휴식은 사치가 아니다. 잘 쉬는 사람이 일도 잘하게 된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도끼로 나무패기 시합을 한다.

  그런데 한 사람은, 잠시도 쉬지 않고, 하루 종일 나무를 팼다. 그러나 한 사람은, 50분 동안 나무를 패고, 10분간 쉬면서, 도끼날을 갈았다. 누가 이겼을까요? 도끼날을 갈았던 사람이다. 이처럼 휴식은 필요하지만, 휴식은 적당하게 해야 한다. 지나친 휴식은, 오히려 사람을 피로하게 만든다.

  휴식이 길면, 삶에 문제가 생긴다. 쉬는 방법을 잘 모르기에, 여름만 되면, 남들을 따라서 어디론가 떠나고, 떠나지 않으면 불안을 느낀다. 그렇게 떠난 휴가는, 고생길일 수밖에 없고, 피로만 남게 된다. 휴가를 마친 사람들에게, 잘 쉬었느냐 물으면, 수척하고 지친 표정으로 ‘쉬느라 힘들었다.’라고 말한다.

  쉬는 방법을 모르기에 그렇다. 휴가(休暇)의 休자는, 사람(人)과 나무(木)의 어우러짐이고, 暇자는 여유 있게 지냄을 말한다. 사람이 나무가 우거진 곳에서, 여유 있게 보냄이 휴가이다. 휴가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곳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어야 하기에, 우리는 휴양회를 한다.

2. 안식하는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거룩하다’라는 말은, 특별히 구별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것들은, 다른 용도로 쓰면 안 된다. (단5장)을 보면, 바벨론 왕 벨사살은, 교만한 사람이었다. 그의 선조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 성전 그릇들을 모두 바벨론으로 탈취해 갔는데, 벨사살은 그 잔에다, 술을 부어 마셨다. 그날 밤에,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썼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단5:25). 하나님이 왕의 시대를 세어서, 끝나게 하셨다, 부족함이 보여서 나뉘어, 메데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는 뜻이다. 그날 밤에, 벨사살 왕은 죽었다. 성전 그릇은 술을 마시기 위한 그릇이 아니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일주일의 하루를, 거룩하게 구별하셨다.

  이날은 하나님을 위해, 특별히 사용해야지, 다른 목적으로 쓰면, 안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고, 하루를 구별해 “다른 용도로 쓰지 말고, 내 목적만을 위해 써라” 하셨다. 많은 사람이 안식일에 쉬지만, 왜 복된 날이 되지 못하는가? 거룩하게 쉬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는 날로 생각하고, 거룩하게 지내지 못하니까, 오히려 더 힘들고 괴롭다. 안식으로 거룩해야 한다. 영적, 정서적, 육체적으로, 우리를 건강하게 만드는, 휴식을 해야 한다. 때론 건강한 놀이가, 안식을 줄 수 있다. 놀이를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나라 교육은, 놀이를 정죄하는 풍토가 있다.

  그러나 현대 교육학은, 놀이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였다. 놀이는 학습이다. 놀이를 통해, 건강하고 인격이 성숙해진다. 스가랴는, 천국을 그리면서, 장난치고 뛰노는 거리로 묘사하였다. (슥8:5)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 천국은 어린 소년 소녀들의 놀이가 있다.

  건강한 놀이는, 여가와 회복에 도움이 된다. 현대 볼링은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된다. 수도사들이 잠시 쉬면서 하는, 공놀이에서 시작되었다. 놀이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나 놀이에 빠지면, 안 된다. 건강하지 못한 놀이도 있다.

  놀이가 끝난 후에 힘을 얻기보다, 더 지쳐있고, 삶의 현장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놀이를 생각한다면, 놀이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놀이가 활력을 주고, 영적으로 회복될 수 있다면, 놀이도 안식의 한 방편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쉼도, 훌륭한 안식일 수 있다. 이처럼 각자 휴가는 달라야 한다.

  놀아야겠다고 생각하면, 애들과 함께 확실히 놀아야 한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을, 이만큼 사랑한다는 표시이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영적 교제를 가져야 한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만남은, 참된 안식을 누리는 연습이다.

  구약시대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안식일의 노예가 되는 잘못을 범했기에,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안식일을 바로 지키는 법을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을 비유로 하셨다. 무엇이 선한 일이며, 무엇이 생명을 구원하는 일인가?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생명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며, 남의 불행을 도와주고, 구제하고 위로하는 일이다. 선한 일로 우리 육신은, 다소 피곤할 수 있지만, 심령은 새로워지고 강건해지면, 육신의 피곤을 이길 수 있다.

3. 하나님은 안식을 통해 복을 주신다(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은 일을 마치시고, 쉴 때 복이 되도록 하셨다.

  ‘복되게 하셨다’는 (바라크, 무릎 꿇는다.)이다,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모습이다. 우리가 하루를 쉬어도, 결코 손해가 되지 않고, 복이 된다는 뜻이다. 옛날 사람들은, 하루를 쉬는 일이 어려웠다. 하루를 쉬면, 손해가 컸고, 살기 어려웠다. 쉬면 대책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쉬는 날을 복되게 하셨다.

  그러면 쉴 때, 어떤 복이 오는가?
(1)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쉬지 못하면 고장난다. 병원 가면, 쉬라는 말을 듣는다. 일만 하는 목사님이여, ‘쉬는 것도 목회다.’

  미국 개척 당시에, 사람들은 동부로 왔다. 그런데 서부로 가면, 살기에 기후가 좋고, 금광도 많다는 소문이 나자, 서부로 많이 몰려가게 되었다. 그런데 서부에 도착해서, 금광을 발견할 사람은, 사업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왜 그런지 알아보니, 보통 사람들은 빨리 가서, 금광 먼저 찾으려고, 서부로 쉬지도 않고 달려가다가 말도 쓰러지고, 사람도 다 지쳐 쓰러졌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가다가 주일이 되면, 하루 쉬고, 또 쉬면서 가니까,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달려가서, 금광도 발견하였다.

  주일날 하루 쉰다고, 돈을 못 번다고, 손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분명히 앞서가게 하신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 거룩하게 안식할 줄 알아야,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안식 제도를 주셨음을 기억하고, 꼭 쉼을 가질 수 있기를 축원한다.

(2) 주님을 만나는 복을 누린다.

복중의 복은, 돈 많이 벌고, 오래 사는 것보다, 하나님을 만나는 복이다. 안식할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복 받은, 가장 올바른 행위는, 예배의 생활이다.

  (창12:8下)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우리는 주일날 예배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교제를 나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주님을 닮게 된다. 부부가 매일, 같이 생각하고, 바라보며 대화하면, 닮게 된다. 이처럼 예배를 통해, 주님을 만날수록 닮아, 결국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된다.

(3) 창조하는 능력이 나타난다.

쉴 때,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 (왕상19장)의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대승을 거두자, 왕후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하자,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쳤고, 결국 낙심하게 되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한다. 그때 하나님은, 잘 재우고, 잘 먹이는 일을 반복하여 해서 치유하셨다. 엘리야는 새 힘을 얻었다. 세상 다툼의 대부분, 배고파서 일이 생긴다. 배고프면 짜증 난다. 잘 먹고 쉼으로, 새로운 힘으로, 재창조하는 힘을 얻기를 바란다.

(4) 공동체가 행복하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선물은 가정과 교회다. 가정과 교회는, 우리가 안식할 수 있는 처소다. 그런데 안식이 없는 가정이라면, 건강하지 못한 가정이 되고, 행복이 마르게 된다.

  그러나 안식을 통해, 서로 사랑을 나누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 공동체는 행복의 샘이 된다. 그러나 현대인은, 이 중요한 안식을 잃어버림으로, 행복이 파괴되어, 가정도 파괴됨을 볼 수 있다. 가정을 그저 잠자는 곳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안식은 우리 가정을 새롭게 만들고, 새 힘을 얻게 하는 터전이다. 같이 쉴 때, 행복이 넘치게 된다. 따라서 혼자만 놀러 가지 말고, 가족과 함께, 쉼을 갖기를 바란다. 안식은 날과 시간 속에 있지, 공간과 장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이 세상과, 저세상을 연결하는 축제의 날이다.

(5) 내려놓는 훈련이다.

욕심이 생기면 안식하지 못한다. 욕심이 많아지면, 안식하는 날과 시간이 아깝다. 그러나 자기 한계를 인정하면, 일에서 손을 놓게 된다. 하나님이 채워주실 줄 믿는다면, 맡길 줄 알아야 안식할 수 있다.

  결론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안식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안식은 일을 그치고 쉬면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흥겨워하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 안에 참 안식이 있으니, 안식의 복으로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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