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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240211 성도의 역할(마5:13-16)
  작성자 : 윤성은 작성일 : 2024-02-16
  첨부파일:   성도의 역할(주일).hwp(90K)

  하나님 아버지, 거룩한 주일, 저희들이 올려드리는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영광을 받아주시옵소서. 구정 명절, 온 가족과 함께, 건강하고 즐겁게 보내게 하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 앞에, 연약하고 부족한 믿음과 허물을 고백하오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무엇보다도 아직 구원받지 못한, 우리 가족들 불쌍히 여겨주시고, 속히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 시간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영광을 받아주시고, 성령 충만함의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장-7장)을 가리켜, 예수님의 산상보훈, 산상설교, 산상수훈이라고 한다. 산상수훈에서 제일 먼저, 예수님은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선포하셨다. 이른바 ‘팔복,’ 여덟 가지 복이라고 불리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천국을 소유하고, 위로받고, 땅을 기업으로 받고, 배부르게 된다.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고,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 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풍성한 복이 있음을, 선포하셨다. 동시에 예수님은, 제자의 삶의 자세와 특징을 말씀했다. 예수님의 제자는,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

  애통해야 한다. 온유해야 한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긍휼히 여겨야 한다. 마음이 청결해야 한다. 화평하게 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 사람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물론 제자들이, 이런 자세로 산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중에는 제자들을 부정적으로 여기며, 그들을 박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팔복을 이렇게 끝맺으셨다.

  (10-12)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그러면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본문 내용이다. 이 세상은 부패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니,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서, 그들을 바르게 변화시키라는 말씀이다.

  어제가 구정이었다. 성도들은 가족과 만남에서,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 세상에 동화되지 말자.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 모두,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으로서,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기를 삶이 되기를 바란다.

1.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 ‘너희’는 예수님의 제자들, 곧 성도들을 말한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명하지 않았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선언했다. 그러니까 이미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 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는, 서서히 세상의 소금이 되어 가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되면, 그 즉시, 세상의 소금이다. 본문은 ‘너희’를 강조한다. “너희만이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가 바로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면, 세상의 소금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2) 왜 예수님은 제자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선언했나? 세상은 소금을 필요할 만큼, 부패했기 때문이다. 소금이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세상은 타락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세계관이다. 한때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세상은 점점 더, 살기 좋은 상태로, 개선된다는 낙관론을 말했다.

  산업과 문명이 발달하면, 사람들은 자기 삶에 만족한다고 생각했고, 그만큼 범죄도 줄어든다고 생각했다. 또한 국가들이 서로 힘을 합치면, 얼마든지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UN을 비롯한, 많은 국제기구가 생겨났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딤후3: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범죄는 더욱 흉악해지고, 전쟁도 사라지지 않았다. 악한 사람들로 인해, 세상은 점점 악해지고 있다. 부패하고 타락한 이 세상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소금으로 삼으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먼저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선언했다. 그런 후에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13)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3) 소금의 특징

① 짠맛이다. 짠맛을 내는 소금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소제물이나 번제물에는, 꼭 소금을 쳐야만 했다(레2:13과 겔43:24).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을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그 위에 소금을 쳐야 했다.

② 변하지 않는다. 성경에 “소금 언약”(민18:19 대하13:5)이 나온다. 옛날에는 언약을 맺는 당사자는, 증인들 앞에서 소금을 먹었다. 소금의 맛을 변하지 않는 것처럼, 서로 간의 약속을 지킨다는 뜻이었다. 소금이 윗사람에 대한 충성(스4:14), 변하지 않는 우정이나 친교(막9:50)를 뜻하는 데도 사용했다.

③ 조미료처럼 맛을 낸다. 소금은 싱거운 음식물에 섞여서, 그 음식물에 맛을 더해준다(욥6:6). 따라서 소금이 “맛”이나, “멋”(골4:6)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④ 해독제(왕하2:21), 소독제(겔16:4), 방부제로도 쓰였다. 이처럼 다양하게 사용됐다. 그런데 그중에서 공통적인 요소가 하나 있다. 소금은 항상, 다른 것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까 소금이 하는 역할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영향력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쳐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에서 해야 할 역할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는가? 예수님 당시에는 지금처럼 소금을 정제하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해 근처에서 생산되는 소금에는, 때때로 이물질로 섞이기도 했다. 만일 소금에, 이물질이 많이 섞여 있으면, 소금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

  그럴 경우, 어쩔 수 없이 밖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버린 소금이 밭에 떨어지면, 그곳에서 자라는 식물들에, 오히려 지장을 준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쓸모없는 소금은 길에 내버리면, 사람들이 오가며 그것을 밟는다. 그 결과 소금은 잘게 부수어져서, 먼지처럼 사라지고 만다.

  물론 소금이 사람들에게 밟힌다고 해서, 소금이 다른 물질로 바뀌지 않는다. 소금은 여전히 소금으로 남는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우리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얻은 구원을 상실하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영원하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구원은 상실될 수는 없다.

  단지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세상에서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함을, 너무나도 안타깝게 여긴다. 따라서 악하고 부패한 세상에 물들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으로, 세상을 바르게 변화시키기를 축원한다.

2.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선언하셨다.

우리가 전에, 예수님 밖에 있었을 때는 어둠이었다(엡5:8).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기에 빛이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삼으셨다.

(2) 왜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삼았나? 빛이 필요로 할 만큼, 세상이 어둡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세상의 빛으로 살면서, 어둠을 물리치며, 어둠을 밝혀야 한다.

(3) 빛의 기능

① 밝히 비추는 기능이다. 어둠은 모두 감추고 숨기지만, 빛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환하게 비춘다. 예수님은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한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산 위에 동네들이, 대부분 있다.

  예루살렘도, 베들레헴도, 나사렛, 헤브론 전부 산 위에 있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겨지지 못한다. 빛이 그 모습을, 환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낮에는 햇빛이 비치어, 그 모습을 밝히 드러낸다. 밤에는 집마다 켜놓은 등불이 비치어, 그 모습을 밝히 드러낸다. 이처럼 낮의 햇빛이든, 밤의 등불이든, 빛은 밝히 비추는 역할을 한다.

② 어둠에 싸인 세상은, 우리의 빛이 필요하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기에,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밝고도, 환하게 비추어야 한다. 아니면 세상의 빛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함이다.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등불을 켜면, 등경 위에 두어야, 등불에서 나오는 빛이, 집안을 환히 비춘다. 등불은 집 안의 어둠을 몰아내며, 집 안에 있는 것을, 밝히 드러내는데, 만일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면 어떻게 되겠는가? ‘말’은 곡식을 될 때 사용하는 그릇이다. 즉 등불을 켜서 덮어버리면, 그 등불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맛을 잃은 소금이 쓸데없는 것처럼, 말 아래 둔 등불도, 쓸모가 없어지고 만다. 등불을 켠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못 되고, 집 안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니 참 안타까운 일일 수밖에 없다. 소금과 빛의 역할은, 똑같이 다른 존재에게 영향을 준다.

  소금의 역할이 간접적이라면, 빛의 역할은 직접적이다. 또 소금의 역할이 소극적이라면, 빛의 역할은 적극적이다. 소금은 은밀하게 스며든다. 녹기에 눈에 잘 보이지를 않는다. 그러나 빛은, 밝히 비춘다. 밖으로 발하기에, 눈에 환하게 보인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말 아래 둔 등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두운 세상에서, 빛을 밝히 비추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역할이기 때문이다. 물론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었다고 해서, 등불의 성질이 바뀌지 않는다. 등불은 여전히 등불이지만,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뿐이다. 등경 위에 둔 등불처럼, 언제나 등불의 역할을 다하기를 바란다.

  구정을 맞이하여, 우리 신앙이 느슨해질 우려가 있다. 자칫 방심하면, 어두운 세상에 동화되기 쉽다. 예수님이 주의하라는 경고대로, 우리의 등불을, 말 아래 숨기지 말자. 등경 위에 둔 등불처럼, 우리의 빛을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빛, 복음의 빛, 사랑의 빛으로, 밝히 비추기를 바란다.

3.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 예수님은 당부의 말씀을 했다. 우리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우리 가문의 명예가, 너희에게 달려있다. 너희가 다른 사람 앞에서 빛된 행동하면, 저절로 우리 가문의 명예가 높아지고, 너희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른 사람에게서 존경받게 된다.”

  이런 뜻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부하셨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우리의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해야 한다. 우리의 짠맛이, 사람에게 스며들게 해야 한다. 등불이 빛을 내기 위해 자신의 심지를 태우고, 소금이 짠맛을 내기 위해, 자신을 녹이는, 착한 행실을 보게 된다.

(2) 그 결과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으로 삼으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이처럼 함께 모여서,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로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 안에서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는 일은, 참 감사하고 축복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잊지 말자. 우리는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하며,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해야 한다. 이제 구정을 맞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이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 가운데는 믿는 분도 있고, 믿지 않는 분도 있다. 산 위에 있는 동네와 같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을, 그들에게 숨길 수는 없다.

  문제는 우리가, 세상의 소금으로서, 그들 앞에서 짠맛을 내느냐, 아니면 맛을 내지 못하느냐 문제다. 세상의 빛으로서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느냐, 아니면 말 아래 두느냐는 문제다. 예수님이 당부대로, 우리의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자. 또한 짠맛이 사람들에게 스며들게 하여,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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