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30319 세 종류의 사람들(눅10:25-37) | |
작성자 : 윤관 | 작성일 : 2023-03-19 |
첨부파일: 세 종류의 사람들(주일).hwp(176K) |
하나님 아버지, 거룩한 주일, 찬양과 경배를 드리며, 저희들이 올려드리는,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먼저, 악하고 추한 모든 죄를, 주님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정결하고 거룩하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함께 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지금 어둡고 악한 세대 가운데,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준행하며, 믿음과 사랑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이 시간 올려드리는 예배를 통해, 저희들의 심령이 치유되고, 모든 예배가 회복되며, 우리 교회가 부흥하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시험하였다(에크페이라조, 철저히 시험하다). (25)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여기서 ‘하여야’(포이에오, 만들다, 산출하다, 실천하다). 율법교사는 무엇을 하고, 만들어 내어야만, 영생을 얻는 줄 알았다.
‘얻는다’(클레로노메오, 상속자가 된다)는, 상속자가 된다는 말이다. 힘을 써서 갖는다는 말이 아니다. 상속은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다. 이율배반적인 질문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으려면, 상속받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만 한다.
어떻게 읽음이 중요하기에,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물었다. (27)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말하자,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라고, 그의 대답을 인정해 주셨다.
1. 악한 지혜(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사람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질문했다. 이웃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 질문하지 않았다.
유대교의 이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잘못을 들춰내고, 비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질문했다. 유대인은 아무나 이웃이 될 수 없고, 분명히 제한되어 있었다. 원 중심에는 자신이 있고, 가족, 친척, 친구, 동족, 유대교 개종자…, 이런 관계에 따라, 이웃이 결정되었다.
이 원에 들어있는 사람만, 이웃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만을 도와주고, 사랑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대인이면서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죄인들로 불리는 사람들은, 이 원에 들어올 수 없기에, 이웃이 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이들과 교제를 하지 않았다. 식사는 물론, 대화도 금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의 이웃 관에 맞게 행동하셨다. 예수님은 지나간 3년 동안,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낙인찍은, 사람들과 교제했다. 이방인도 거리낌 없이 만났고, 그들의 문제도 해결해 주셨기에, 예수님을 (7:34)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율법교사는 (29)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며, 도전적인 질문을 했다. 만일 예수님이 유대인의 이웃관에 따라 대답하면, 예수님이 죄인들과 이방인들과 교제한 일을 들어서, 율법을 어겼다고 폭로할 계획이었다. 또 예수님이, 이웃을 죄인과 이방인까지 확대하면, 율법에 반대된다고 폭로하려고 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고, 자기 자신의 정당함을 내세우려는, 의도를 가지고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의도를 따라 ‘이웃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지 않고, 비유로 말씀하셨다. 시험에 빠뜨리는 지혜는 악한 지혜다. 마귀는 악한 지혜를 준다.
악한 마귀는 우리를 공격하다 실패하게 되면, 우회전략을 쓴다. 함정을 판다. 마귀는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해서, 성도를 무너뜨리려고 하수인을 쓰는데, 때때로 하수인에게 영감을 준다. 마귀가 주는 지혜와 영감도 대단하다. 마귀는 악한 일을 시키기 위해, 지혜를 줄 때가 있다.
사기 치는 사람이나, 도둑질하는 사람들의 지혜를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그래서 아무리 튼튼하게 금고를 만들어도, 못 여는 금고가 없다. 대단한 지혜다. 경찰은 금고를 열려고 하면 못 여는데, 도둑은 자유자재로 연다. 악한 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범죄자들의 아이큐를 조사했더니, 아이큐 150을 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인류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들은 천재였다. 마귀는 악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 부지런함과 건강을 준다. 선한 일을 위해서는 밤새우는 일이 드물지만, 죄를 짓기 위해서는, 밤새는 일이 많다. 도박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복음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을 살리라고 주셨다. 그런데 이 율법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을 살리기보다, 예수님을 죽이려는데 사용했다. 하나님이 수술용 칼을 주셨는데, 사람을 찔러 죽이려는데 사용했다.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
이단은 사람과 교회를 살리려고 쓰지 않고, 죽이는데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성경으로 자신이 얼마나 정당하고, 저 사람이 얼마나 악한가를 증명하는데, 사용하지 말라. 말씀을 통해, 영혼을 살려야 한다. 말씀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는데, 사용하지 말고,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말씀으로 삼기를 바란다.
2. 세 종류의 인물(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말씀했다. 예루살렘은 792M이지만, 여리고는 해면 250M 아래에 위치하기에, 급히 내려가는 길이다. 이 길에는 옛날부터, 강도들이 숨어 있다가, 이 길을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괴롭혔다. 그 당시에 ‘피로 얼룩진 길’이라고 불렸다.
한 여행자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모두 다 빼앗기고, 옷도 벗기고, 매를 맞아서 거의 죽은 상태가 되어, 길에 버려져 있었다. 속히 도움을 받지 않으면,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는 위기에 놓여 있었다.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피해 갔다’(안티파렐코마이, 반대편으로 갔다) 마침은 죽어 가던 사람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는데, 반대편으로 갔다. 제사장은 제사를 집행해야 하기에, 시체를 만지면, 더러운 몸이 되니, 부정하게 될까, 피하여 지나갔다.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한 레위 사람도, 그 길로 내려가다가, 제사장과 똑같이, 그 강도 만난 자를 보고도, 도와주지 않고, 피하여 지나갔다. 강도 만난 사람은, 이스라엘의 지도층으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여기에 3종류 사람이 등장한다. 우리의 모습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1) 강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고생하는 사람을, 길목에서 지키고 있다가, 위협하여 헤치거나, 죽여서 빼앗아 가는 강도다. 강도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약탈 대상으로 보았다.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어떤 해를 입히든지, 전혀 상관이 없었다. 옛날에는 옷이 귀하고 비쌌으므로, 값나가는 것은 모두 다 빼앗겼다. 목숨까지 빼앗길 뻔했다. 사기 치는 사람도, 여기에 속한다. 물리적으로 해치는 사람은 물론이고, 말로 해치는 사람도, 여기에 속한다.
(2) 제사장과 레위인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외면하고 피한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에게, 있으나 마나다. 무관심의 사람으로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다.”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다.
“나도 너를 괴롭히지 않을 테니, 너도 나를 괴롭히지 말고, 수고도 하지 말라.” 아주 매정하고 모진 사람이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성경을 백성들을 가르쳤다. (출23:5)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곤경에 처한 짐승도, 도와주어야 하는데, 하물며 사람을 도와줌은 당연하다. 그러나 머리로는 말씀을 알고 있지만, 말씀이 그의 행동을 지배하지 못했다. 머리 따로, 행동 따로였다. 그들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3) 사마리아 사람(33-34).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이스라엘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은, 원수 관계였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포도주와 기름을 상처에 붓고 싸맸다.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그리고 다음 일까지, 책임지겠다고 희생했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 거리를 좁히는 마음씨이다.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꼭 있어야만 했던 사람이다. 우리의 이웃은,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3.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
(1) 불쌍히 여겼다(33). “…불쌍히 여겨”
‘불쌍히 여겼다’(스플랑크니조마이)는, 일반적으로 예수님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 느끼신 동질의 ‘불쌍히 여김’을, 자신도 똑같이 느꼈다.
(2) 접촉(34) “가까이 가서…”
그는 행동하는 발이 있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아직 이 지역에, 강도들이 지키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자신만 살겠다고 빨리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 이 사람을 살리기에는 너무 늦었고,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마음은, 장애를 바라보지 않고, 기회를 바라본다. 사랑한다면 가까이 가야 한다.
(3) 보살핌(34)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자신의 여행을 위해 준비한, 기름과 포도주를 희생당한 사람의 상처를 씻었고, 기름으로 치료했다.
그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자기가 하려던 계획도 포기했다. 낯선 이방인에게 자기의 시간을 기꺼이 주었다. (35)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숙박과 치료를 위해, 자기 여행경비 중에, 두 데나리온을 지불 했고, 돈이 더 들면, 돌아올 때 지불 하겠다고 했다. 사랑에는 지불 하는 희생이 있다.
희생하지 않고,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내 근처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돈도 써야 한다. 그런 희생이 있어야, 열매가 있는데, 희생하지 않고, 거절한다. 우리는 이웃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한다. 이웃에게 뜯어내려고 하지 말자. 긍휼을 베풀며 살려면, 항상 치러야 한다.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성과가 없다. 예수님은 사랑을 베풀어주기 위해, 십자가의 큰 대가를 치렀다. 사마리아 사람은, 희생자를 돕기 위해, 어떤 위원회를 조직하지 않았다. 스스로 일했고, 대가를 치렀다.
결론이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질문한 율법교사를 향해, 예수님은 오히려 물으셨다. (36-37)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율법교사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해야 했는데, 그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돌려서 말했다. 예수님은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했다. 율법교사의 질문에는, 자기를 드러내려는 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강도 만난 자의 도움이 되는, 이웃이 되라고 말씀했다.
우리는 이웃을 결정하거나, 선택할 수 없다. 하나님이 보내주신다. 따라서 도움을 필요한 사람에게, 항상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 행함이 없는 위선적인 행위를 고발했다. 살다 보면, 주님께서 강도 만난 사람들을 보내 주신다.
상처받고 눈물 흘리는 사람,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 없는 이웃이 있다. 그런데 도와주지 못하기에, 그들은 홀로 왔다가, 홀로 갈 뿐이다. 한 교회에 출석하기에 이웃이 아니다. 내 상처와 눈물과 고독과 아픔을, 싸매 줄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이웃이다.
우리는 언제, 내 곁에서 몸부림치고, 괴로워하는 사람의, 신음을 듣기 위해 귀를 얼었나? 비틀거리고 아파하며, 쓰러지는 이웃들을 보기 위해서, 눈을 열어 보신 적이 있나요? 예수님은 우리 눈물과 고통, 고독과 질병을 지고,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한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나님은 오늘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찾으신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다면, 물질과 시간과 노력으로, 괴로워 몸부림치는 사람을 끌어안을 수 있기를 축원한다. //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하며, 잘 알기만 하는 믿음이 아니라, 아는 것을 실천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외롭고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 선하고 좋은 이웃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천하는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은 종교인이 아니라, 진정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율법을 완성하는 삶, 말씀을 사모하며 순종하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되길 원하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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