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30108 열리고 풀리는 이적(막7:31-37) | |
작성자 : adminstrator | 작성일 : 2023-01-14 |
첨부파일: 열리고 풀리는 이적(주일).hwp(32K) |
하나님 아버지, 거룩한 주일, 영과 진리로 올려드리는, 저희들의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고, 심령의 눈과 귀를 열어주셔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찬양하고 기도하며 전도하는 삶을 살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우리 삶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채워주시고, 주님이 베푸신 이적을 간증하며, 복음을 널리 전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31-37)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
이적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적을 행하실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적을 베푸실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다. 이적은 문제가 있어야 한다. 모든 이적은, 문제가 있기에 일어났다. 문제가 없었다면 이적도 없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이적은, 문제가 있었기에 일어났다.
홍해가 갈라짐은, 바다가 가로막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절체절명의 위기가운데,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 주셨다. 마라의 이적은, 물이 써서, 먹을 수 없었기에 일어났다. 가나 혼례식의 이적은, 포도주가 떨어졌기에 나타났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이적은, 문제 때문에 주님을 만남으로 일어났다.
이 사실을 알 때, 문제는 오히려 축복이라는, 시각의 변화가 일어난다. 따라서 문제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문제를 환영하고, 이적의 하나님을 바라보자. 믿음의 사람들은, 문제 때문에 더욱 잘되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버림받았기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가족과 민족, 세계를 구했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해서, 브닌나에게 멸시를 당했고, 괴롭힘을 당했다. 그렇기에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아이를 낳았으니, 문제 때문에 더욱 잘 된 사람이다. 이처럼 문제는, 이적을 만드는 재료다. 모든 이적은 문제와 함께 시작된다. 따라서 모든 문제, 부족, 어려움, 고통이 있을 때, 오히려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회로 만들고, 우리 영혼이 성숙해지도록 힘써야 한다.
본문은 듣는 귀가 막혔고, 말하는 혀가 묶여 있는 사람을, 예수님이 만나주신다. 그래서 귀먹고 혀가 묶여 있는 사람이,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는, 이적을 경험하게 된다. 만약 이 사람의 귀가 막히지 않고, 혀가 잘 움직였다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 막혔기에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게 되었다.
결국 우리의 부족함은, 주님을 만나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삶에서 부족함이 있다면, 원망하지 말고 감사하자. 부족함을 이적의 재료로 삼아라. 그것이 지혜요, 능력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막히고,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할 수 있을까?
1. 마음의 문을 열어라(32-33).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말 더듬는 자’는,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다. 예수님은 그를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 따로 치료하셨다. 장애인은 분위기와, 다른 사람의 행동에 민감하기에, 그 심정을 아시고, 데리고 나가셨다. 그를 향한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예수님과 단 둘이 있을 때, 그의 마음이 평정되었다. 이렇게 주님은 그의 마음을 여셨다. 귀 먹고, 말을 어렵게 하는 자를, 주님은 왜 따로 데리고 가셨나? 지금 그는 사람들의 손에 데리고 온, 피동적 상태였다. 사람들이 안수하여 달라고 간구했다. 그는 치유 의지가 없었다. 마음이 닫힌 자였다.
듣지도 못하고, 말도 더듬는 이 사람을, 공개적으로 다루었다면, 그는 당황해서, 완전히 마음의 문을 닫을 수 있기에, 배려하는 마음으로, 따로 데리고 가셨다. 그의 처지를 아시고, 개인적으로 접근하셨다. 아무리 은혜를 베풀어 주려고 해도, 마음의 문을 닫아 놓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없다.
이 컵에 생수를 부어주려고 해도, 뚜껑을 닫아 놓으면, 물을 부을 수 없기에, 예수님은 귀먹고 혀가 묶여 있어,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을,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일대일의 관계에서, 그의 장애를 고쳐 주셨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니라, 주님과 일대 일로 만나야 온전히 치유된다.
예수님은 바쁜 중에서도, 무리를 피해,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의 교제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눅5: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우리도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기 원한다면, 주변의 모든 잡음을 차단하고, 단 둘의 은밀한 만남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공동체에 복을 주시지만, 홀로 있을 때, 은혜의 복을 베풀어주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 것과 떨어져, 홀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원한다.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조용히 주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면,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예수님은 환자에게, 전혀 손대지 않고도, 능히 치유하실 수 있는 권능이 있다. 그런데도 이런 미신적 행위로 오해받을 수 있는, 침을 뱉고, 손을 대시며 치유하셨는가? 이런 행동은 환자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 믿음을 주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먼저, 믿음을 심어주기 원하셨다.
믿음이 없이는, 역사를 이룰 수 없다. 침은 그 당시, 민간요법으로 많이 활용되던 치료법이다. 침은 치유의 효과와, 재앙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침이 닿았을 때, 주님이 치료하신다는 믿음이 생겼다. 이처럼 주님은, 개인적으로 필요한 처방을 가지고 접근하신다.
내 처지, 내 절망, 내 고독, 내 눈물을 아시고, 주님은 나에게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다가오시면서, 내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이다. 그 주님은 나를 고칠 수 있는 분이다. 따라서 나에게 다가오시는 주님께 마음의 문을 여시고,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란다.
2.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라.
이적은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올 때에 일어나며, 기도를 통해 일어난다.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이 사람의 인생길은, 지금 막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은, 항상 열려 있다. 모든 길이 다 막혀 있어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항상 열려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에는 홍해가, 뒤에는 애굽 군대가 뒤 쫓아와, 진퇴양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할 때, 이적이 일어났다.
모든 길이 다 막혀 있어도, 주님께서 열어 주시면 열린다. 예수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까지, 가지신 왕이다. (계3:7中-8中)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다윗의 열쇠’는 ‘왕의 열쇠’라는 뜻이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라는 말이다. 다윗 왕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님이, 문을 열어주시면, 능히 닫을 사람이 없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인생의 문, 천국의 문, 지옥의 문을 열고 닫는 열쇠를 소유하신,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실 때, 하늘을 바라보셨다.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하나님이 계신 하늘을 우러러볼 때, 인생은 새로운 길이 열린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눈을 들어 우러러보셨다.
(요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오병이어를 일으키실 때에도, 하늘을 우러러 보셨다(막6:41). 따라서 사방이 막혀, 일이 풀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계신 하늘을 우러러보라.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그를 떠났을 때, 하나님은 그가 하늘을 우러러 보게 하였다(창15:5).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 후에, 입을 여셨다. 그리고 ‘에바다’ 즉 열리라고 명령하셨다. 그때 귀먹은 자가 열리고, 묶인 자의 혀가 풀렸다. 인생의 새로운 길이 열렸다.
우리 인생은,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결정되고, 누구를 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자신을 보고, 환경을 보면 힘이 빠진다. 따라서 힘들면,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라. 높은 산을 바라보라. 그 높은 산 위에 계신, 성전에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라.
(시12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오늘도 하나님은, 사람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그들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귀 먹고, 묶여 있는 혀를 고치실 때, 권세를 가지고, 에바다, 열리라고 명하셨다. 예수님이 명령하자, 닫혀있고, 풀리지 않은 인생이, 열리고 풀리게 되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쳐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다. 권세를 가지고 언제나 명령하셨고, 명령하신 그대로 되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막1:41),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막1:25),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막5:34)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명령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병 고쳐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를 사용해 병든 자를 고쳤다(행3:6, 9:34, 40).
예수님의 이름은 능력이요, 천국의 열쇠다.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14:13-14). 초대교회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 권세를 사용하라. 마귀를 두려워하지 말고 사용하자.
3.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라(34上).
“…탄식하시며…” 탄식했다(스테나조)는, 상대방의 안타까움과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느끼며, 슬펐다는 말이다. 주님은 그의 안타까움과 아픔을, 자신의 안타까움과 아픔으로 느꼈다.
듣지 못하는 아픔, 제대로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얼마나 괴로웠을까? 주변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조롱당하는 아픔이 얼마나 심했을까? 견딜 수 없는 고독, 소외, 단절의 아픔, 그런데 믿음이 전혀 없는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자신의 아픔처럼, 함께 느끼시며 신음하듯, 아픔을 내뱉으셨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이웃들과 더불어,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웃의 고통을 치료하는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사람들을 치유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이웃들의 아픔을 공감하셨기에, 치료하셨다.
히브리기자는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하였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라며, 2중 부정으로 말했다.
우리와 더불어 연약함을 동정하신다. 동정한다는 함께 고생하고, 느낀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고생하신다. 우리의 좌절을 아신다. 분노를 아신다. 속상함을 아신다. 나의 고통과 눈물을 아신다. 나의 방황을 아신다. 나의 답답함을 아신다.
견딜 수 없는 나의 부끄러움과, 무기력함을 주님께서는 아신다. 어쩔 수 없는 나의 좌절을 아신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고치실 수 있다. 우리가 공감할 때, 그 아픔을 함께 느낄 때, 치유의 능력이 솟아난다. 아픔이 능력이고 사명이다.
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아픔을 주시는가? 그 아픔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라는 주님의 뜻이다. 홀로 된 사람에게, 최고의 위로자는 누구인가? 먼저 홀로 된, 아픔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들은 아픔이 있다. 그 아픔을 사명으로 여겨야 한다. 이웃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에바다! 주님의 이 음성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닫힌 공간에서, 외롭게 고통당하는 그들을 주님은 아신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 속 깊은 고통까지도, 어루만지기 원하신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말씀하신다. “네 닫힌 마음과 세계가 열릴지어다. 축복의 문, 형통의 문이 열릴 지어다…”
어떤 문제가 있는가? 길이 막혀있고,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는가? 사방이 모두 막힌,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가? 낙심하지 말라. 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항상 열려있다. 하늘 문은 항상 열려있다. 기도할 수 있다면 낙심하지 말라. 우리는 천국의 열쇠를 소유한 사람이다.
기도로 천국 열쇠를 사용하라. 길이 막히고,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은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신다.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사람들을 보내주신다. 지혜도 주시고, 우리의 길을 열어주시고, 풀려지게 만들어 주신다.
그러므로 주님을 의지하여, 힘든 문제를 해결하라,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되기 바란다. 그 길이 바로 예수님을 증언하는 길이다. 이적을 창조하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길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있기를 축원한다. //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에바다!’, ‘열려라!’ 명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해 주시옵소서. 마땅히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는 귀가 열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닫혀 진 입이 열려져, 찬양과 감사와 기도의 삶을 살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우리 삶에, 더 큰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하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인생의 문이 열리고, 질병이 치료되며, 귀와 입이 열리는, 주님의 이적을 간증하며, 복음을 널리 전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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