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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22. 12. 25.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요3:16) / 1,2부
  작성자 : adminstrator 작성일 : 2023-01-14
  첨부파일: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주일1. 2부).hwp(32K)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임마누엘! 이 땅에 오신 예수님, 모두 함께 기뻐하며, 찬양과 경배로 올려드리는 성탄 축하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천사가 이르되,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어둡고 죄 악된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이 기쁘고 복된 소식을, 온 세상에 널리 전하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 시간 성탄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성탄의 주인 되시는 주님 안에서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말은 행복이라고 한다. 사람은 행복에 목말라한다. 사막에서 한 방울의 물을 갈망하듯이, 행복을 찾아 긴 여행을 한다. 그러나 행복은 그림의 떡처럼, 잡히지 않는다. 행복은, 과연 이디에 있는가? 행복은 하늘 위에도 없고, 땅 아래도 없고, 내 마음에도 없지만, 포기할 수 없다.

행복은 오직 한 분, 예수님에게 있다. 왜 예수님께 나아가야 행복할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려고 오셨다.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전하시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왔다. 그때 예수님은, 행복에 대해 말씀했다. 그 말씀이 팔복이다(5).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그 무엇보다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1. 행복이란 과연 무엇인가?

성경은 올바른 관계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이웃, 물질과 관계를 맺고 산다. 3부분에서 관계를 잘 맺으면, 행복하게 된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영원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과 원수인 죄인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나? 세상의 복은, 이 땅에서 웰빙(잘 사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성경은 이 땅에서의 복만 아니라, 영원과 연결되기에, 웰다잉(잘 죽는 것)을 잘해야 행복하다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 죄를 해결하지 못해, 미래를 올바로 준비하지 않는 사람이, 어리석다고 말씀한다.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펄펄 끓는 지옥 불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1:21).

이웃과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의 제사장으로 부르셨다. 제사장은 다리를 놓아주는 사람이다. 성도들은 세상에, 다리를 놓아주는 제사장이다.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에게, 주님을 소개하여 다리를 놓아주어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가정과 직장, 교회에서, 아름다운 관계를 잘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바란다.

물질과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 물질의 종이 되어, 물질에 끌려 다니면, 행복할 수 없다. 돈은 모셔둘 때 행복하지 않고, 아름답게 사용할 때, 행복하다. 하나님은 물질을 정복할 수 있는 힘을 주셨기에, 물질을 정복할 수 있는 성도가 되기 바란다. 그래서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고 하였다.

2. 밀레의 그림에 나타나는 행복의 조건

제가 어렸을 때, 이발소마다 걸려 있었던 그림이 있었다. 혹시 무슨 그림인줄 아시나요? 바로 밀레의 만종이라는 그림이다. 만종의 그림을 잘 보면, 그림 속에 행복의 조건이 담겨져 있다.

먼저 노동의 신성함이 있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은, 일에 대한 즐거움이다. 루터는 노동은 바로 기쁨이라 했다. 밭에서 함께 일하는 부부의 모습은, 신선하다 못해 성스럽다.

일은 타락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죄의 형벌이 아니었다. 사람은 일하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일할 때 평안을 수 있다. 에덴동산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아담은 창조되자마자 일했다.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일을 해야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데, 타락한 인간은 일 자체를 거부하고, 싫어한다. 그래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거나, ‘처자식 먹여 살리기위해서 일하며, 일을 형벌로 여긴다.

그러나 일하지 않고 살 수 있지만, 일하지 않으면 죄악이다. 요즘 같으면, 일터가 있다는 말은, 정말 축복임을 알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직장이 없는가! 그러니 일할 수 있다는 말은 축복이다. 할 일이 있다면 축복이다. 성도에게는 할 일이 있는데, 영혼을 살리는 전도다. 그래서 참 감사하다.

그러나 만종을 보면, 일만 강요하지 않는다. 일하다가 쉬는 쉼이 있다. 모든 그림이 시각적인데 반해 만종은 청각적이다. 그림 속에서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온다. 뎅그렁 뎅그렁 종소리가 들려오자, 부부는 일손을 멈춘다. 거기 쉼이 있다.

만종이 편안함을 주는 이유는, 쉼 때문이다. 사람이 일에만 매달리면 피곤하지만, 만종은 일을 재촉하지 않는다. 쉼이 있기에, 평안이 있다. 일한 자에게 주어지는 휴식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손을 모으고, 함께 기도하는 부부가 있다.

기도라는 끈으로 묶였기 때문이다. 부부는 기도로 하나 되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까? 일터를 주심을 감사하고, 수확이 있음을 감사하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니 감사하고, 오늘도 하루를 무사하게 지냈으니 감사하고, 돌아갈 가정이 있음을 감사하며, 기도하는지 모르겠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행복을 보여주고 있다. 밀레가 파리로 그림공부를 하러 떠날 때, 할머니 루이스 쥬므랑은 이런 충고를 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가 있다. 화가가 되기 전에, 크리스천이 되어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여 믿음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죽는 게 낫단다. 영원을 위하여 그림을 그려라. 늘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들려옴을 알고 살아라.”

할머니는 이런 인생의 교훈을 주면서, 손자를 파리로 떠나보냈다. 그런데 파리에서 공부하던 밀레가, 잠깐 엉뚱한 길로 빠졌다. 그가 유학 온 목적도 잊은 채, 타락의 길로 접어들 뻔했다.

몇 푼을 위해 그림을 그렸고, 그가 그린 그림을, 길거리에 걸어놓고 파는, 길거리 화랑을 지다가가 뜻밖에도, 술 취한 사람이, 그림에 대해 비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기서 다시, 할머니의 훈계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파리생활을 청산하고, 바르비종으로 이주하여, 오직 그림에만 몰두했다. 그때의 작품들이 하나같이 명작들이다. 그 이후로 그림들 속에는, 할머니의 교훈까지 담게 된다. 우리는 자녀를 어떻게 교육시키는가? 좋은 성적만을 위해 교육하지 않는가?

하나님도 모르고 공부만 하면, 올바른 교육이 될 수 있나?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없다면, 행복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만종에는 아름다운 가정의 모델이 있다.

어떤 화가가,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목사님을 찾아가서 질문했다. “목사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요?”

목사님은 그야 믿음이지요, 믿음은 모든 절망을 이기고, 죽음까지 정복할 수 있는 생명입니다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화가는, 고개를 끄떡였다. “맞아, 그거야자신이 찾고 싶어 했던, 아름다움을 찾아낸 화가는, 행복함이 넘치는, 또 다른 사람을 찾아냈다. 그 사람은 막 결혼한 새색시였다.

그래서 그는 새색시에게 다가가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요?” 그러자 새색시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지요, 사랑이 있어야 생명을 만들어 내고, 사랑은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고, 또 사랑은 눈물도 달콤하게 만들잖아요.”

화가는 그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아 바로 사랑이야라고 했다. 화가는 이제, 자신의 발견한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기 위해,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지친 한 병사가, 쓰러질듯 지친 몸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한 화가는, 병사를 붙들고 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입니까?” 병사는 평화가 최고로 아름답지요, 평화는 전쟁을 멈추게 하고, 참된 안식과 기쁨을 가져다주니, 평화야말로 우리 모두의 소망이지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화가는 역시 고개를 끄떡이며 맞아 바로 평화야!”

그러나 화가는 아름다운 것을 또 발견하고, 고민에 빠졌다. 하나나 둘도 아니고, 3가지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한꺼번에 화폭에다 담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그는 근심에 싸여, 집으로 걷고 있었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던, 그의 자녀들이 아빠를 보고, 너무 반가운 나머지 아빠!”하고 가슴에 안겼다.

그 순간 그는, 가슴에 안기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믿음이 무엇인지 발견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는 아내의 눈에서, 사랑을 읽었다. 그리고 믿음과 사랑을 발견한 순간, 화가는 그의 마음속에, 평화가 밀려옴을 느끼게 되었다.

화가는 지체하지 않고, 자신이 그토록 그리고 싶어 하던, 그 아름다움을, 모두 다 화폭에 담았다. 그것이 바로 가정이었다. 만종에는 이처럼 아름다운, 가정의 모델이 있다. 스위트 홈이 제공할 수 있는 일과 휴식, 그리고 하나 됨, 그 아름다운 가정의 모델을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 만종이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이렇게 명령했다.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명령을 보면, 가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래서 이 명령에 대해, 마귀와 그의 졸개들은 충격을 받았다.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귀는, 가정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가정만 쓰러지면, 그 권한이 자기 것임을 알았기에, 먼저 말씀을 듣지 못한 하와에게, 공격의 화살을 쏘았다. 악령들은 하와가 쓰러지면, 남편이 쓰러지고, 남편이 쓰러지면, 자녀가 쓰러지게 됨을 알았다. 하와는 남편의 돕는 배필이다. 돕는 자가 쓰러지면, 가정의 머리인 남편이 쓰러짐은 시간문제다.

부모가 쓰러지면, 자녀가 쓰러지는 일도, 시간문제가 된다. 이렇게 아담의 가정은, 쓰러지게 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고통과 저주가 있는 곳으로 쫓겨나, 죽음을 선고받았다. 아담의 가정에,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다. 커다란 댐이 무너지려면, 동전만한 구멍 하나만 생겨도, 둑은 무너진다.

가장 작은, 벽돌 한 장이 무너져도, 큰 집은 무너질 수 있다. 이처럼 가정의 기초가 무너지면,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질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가정에서부터 전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정을 주심을 감사하고, 잘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

3.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

세상을 살면서 가장 싫고, 힘들고 어려운 일은, 사람에게 오해받는 일이다. 분명히 좋은 뜻인데도, 나쁜 뜻으로 오해받고, 분명히 사랑하는 마음인데도, 미워하는 마음으로 오해받으면, 정말 힘들고 괴롭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오해받는 분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죄에 빠진 우리를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무조건 싫어한다.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보여준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세상인데, 세상은 사탄의 꿰임에 빠져서, 타락한 인생들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했다. 그러나 인간들은 제 멋대로 살아서, 하나님 앞에 타락했다. 이 타락한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이처럼은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는 말이다(21:8).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광야에서 원망하고 불평할 때, 불뱀이 나와서 그들을 물어 죽게 되었다.

(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보는 사람들은 살아났다. 그러나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죽게 되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씀이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이 땅에 오셨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우리 죄를 해결하려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 따라서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예수님을 내 마음의 구세주로, 주님으로 영접하시기 바란다. //

기도하겠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하신, 예수님 탄생의, 기쁘고 복된 소식을, 온 세상에 널리 전하는, 저희들이 되기 원합니다.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온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열방의 모든 백성에게 임하여 주시옵소서.

아직도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죄 가운데 고통하며,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이웃에게, 예수님 탄생의 기쁜 소식과 구원의 복음을, 부지런히 전하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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