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0년 8월 30일 - 하나님이 없다고…(시14:1-7)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21-08-10 |
하나님이 없다고…(시14:1-7)
(1-7)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하신 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 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
(삼상25장)을 보면, 사무엘이 죽자,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광야로 내려갔을 때, 일어났던 이야기가 나온다. ‘나발’은 큰 부자였지만 미련했다. 다윗은 자기 소년들을 나발에게 보내서, 네 집이 평강하기를 원한다면서,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했지만, 나발은 그들을 무시해서, 돌려보낸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을 모욕했고, 다윗이 나발의 양떼와, 목자를 보호해준 사실을 간과했다. 또한 나그네 대접에 대한, 율법규정도 무시했다. 이런 점에서, 나발은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세상 쾌락과, 재물의 축적이었다.
나발은 어리석다는 뜻이다. ‘나발’은 영적, 정서적으로, 판단력이 부족함을 의미하는 단어다. 성경이 말하는 어리석음은, 지능지수가 낮거나, 지식이 부족함을 의미하지 않고, 피조물의 위치를 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교만 방자하게, 행동함을 의미한다.
성경은 이처럼, 어리석은 자의 모습이 어떠한지, 묘사한다. 어리석은 자는, 어떤 마음을 갖고 있으며,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말씀한다. 그들은 진정, 종교의식에는 참석할지 몰라도, 하나님에 대해 모르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삶을,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1. 어리석은 자의 모습(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부인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무신론자’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정말로 믿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성경에 없다는 말이, 2가지로 나온다. ① ‘엔’ 진짜 없다. ② ‘헤세르’ 있지만, 없는 경우, 부족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없다는, 하나님이 진짜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계셔도,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의 생각과 철학에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스스로 마음에 이르며, 행동하는 무신론자들은 참으로 많다.
(1) 그러면 어리석은 자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눈에는, 물질적인 것만 보이고, 영적존재는 볼 수 없다. 이들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믿지 못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 많다. 공기와 전파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부정하는 순간, 인간의 존재가치는, 무의미하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보이지 않는 도덕, 사랑, 의지가, 의미가 없기에, 본능에 따라 사는, 동물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② 부패하며 행실이, 가증하다.
하나님이 없다는 자는, 행동이 부패하고, 행실이 가증하다. ‘부패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맞서기에, 결국 멸망하게 된다. 부패한 자가 망하게 됨은, 공의의 하나님에서 오는, 필연적 결과이다.
‘가증하다’는, 거룩한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더러움을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에, 혐오스런 죄를 지으면서도, 뻔뻔하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기에, 결국 하나님의 증오와, 분노의 대상이 된다.
자기의 부패와, 가증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의로 양심의 소리를 거부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는, 예수님을 살려두면, 자신들이 죄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행동이 부패하며, 행실이 가증한 자들은, 무신론을 주장한다.
③. 선을 행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즉 ‘선’을 행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인격에서는, 선한 행위가 나올 수 없다. 인간은 본래,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다.
선의 기준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 무신론의 가장 큰 위험은, 결국 인간을 망하게 만든다. 사람이 존귀한 이유는,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들은, 인간은 개돼지와, 다를 바가 없다. 동물들 가운데 가장 진보한 존재이기에, 목적을 위해서는, 사람의 생명도, 아주 쉽게 빼앗는다.
(2) 그러면 성경은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 하는가?
① 상식과 이성에서, 어긋나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다.
사람들은 원인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말이 있다.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런 엄청난, 우주를 보면서 ‘하나님이 어디에 있어? 이것은 저절로, 우연히 생긴 거야!’라고 한다면, 그는 정말 어리석은 사람일 수밖에 없다.
② 인간의 보편적인 생각과, 믿음으로부터, 어긋나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다.
하나님을 믿음은, 인간에게 너무 보편적이고 타당하다. 어떤 족속이나, 나라들을 막론하고 문명인이나, 원시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
이는 교육을 통해서, 된 것이 아니다. 종교가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교육은 고사하고, 글자도 없는 원시인들까지, 자기 나름대로의 신을 믿으며, 종교의식을 행했다. 이는 인간 본연의 마음에 있는, 창조 때부터, 부여된 것이다.
③ 사람의 양심과, 속사람의 외침에서, 어긋나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다.
사람들의 양심으로부터, 하나님이 계신다는 음성이, 계속 들려온다. 죄를 지으면 두렵고 떨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양심적인 무신론자라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기 보다, 오히려 ‘하나님이 없으면 좋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이들은 왜, 하나님이 없기를 바라는가? 스스로 부패하여, 부끄러운 일들을 했으며, 선한 일을 모르며, 죄와 어울려 있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2. 악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2-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셨다. 그러나 사람들이 정도에서 벗어나, 악에게 끌려, 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타락하고 부패한 삶을, 살고 있었다. ‘치우쳤다’라는 말은 ‘자기 고집대로 행하다, 고집스럽게 반항하며, 떠났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기 고집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선한 삶을 살아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며, 악을 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을 행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이 세상에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을 찾지 못했고, 예루살렘 성에는 의인, 1명을 찾지 못해서, 심판을 받게 되었다. 세상에는 의인만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마저도,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다윗과 같이, 인간의 부패성과, 죄상에 대해서, 철저한 자기 발견이, 있어야 한다.
인간의 처절한 부패성을, 발견하지 못할 때, 우리는 구원의 가치를, 가볍게 볼 수 있다. 우리 인간들 중에는, 선한 자가 하나도 없으며, 모두 바른 길에서 치우쳐 행동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인간의 모든 제도는, 완벽하지 못하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모두 다 완벽하지 못하다.
사회주의는 이익을 배분하는 공동 배분하는 방식을, 추구하고,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추구한다. 남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더욱 정의롭게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사회주의는, 하나님이 없는 자본주의보다, 더욱 악하고, 교만한 사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낙원을 상실한 이유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스스로 낙원을 만들기, 원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바벨탑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은 상태로, 인간들이 스스로, 낙원을 회복하려는, 모든 시도는, 마귀의 작전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없음을 전제로 한 진화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에 근거한, 공산주의의 시작은, 태생적으로 반기독교적일 수밖에 없고, 기득권을 잡았을 때는, 매우 크게 부패할 수밖에 없다. 작은 정부에서, 타락한 기득권들은, 개인적인 비리로 끝난다.
지상의 낙원을 만들겠다면서, 어마어마한 복지제도와, 큰 정부를 만들겠다는 전체주의에서는, 타락한 기득권이, 나라를 완전히 망친다. 공산주의는 성선설에, 기초할 수밖에 없는데, 지도자에 대한, 팬 심과 숭배를, 기본으로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의 사악함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곳은, 공산주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다. 창조의 목적, 사람됨의 길과, 삶의 바른 이치가, 진리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함은, 피조물의 숙명을 받아들이며, 겸손한 마음으로, 진리를 배우겠다는 고백이다. 지혜로운 자는, 배우는 자다.
인간의 한계와, 자기중심 됨을 인정한다. 이러한 자의 삶의 여정에는, 하나님으로 인한 선한 행실과, 덕으로 채워진다. 반면에, 진리를 배우려 하지 않는 자의 삶은, 부패해진다. 행실은 가증스럽고, 악을 행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인생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가?
정확히 말하면, 지각이 없기 때문에, 찾지 않는 것이 아니라, 찾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인생에는 없기에,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인생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우리는,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충분히 하나님을 알고,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빼앗아가고 말았다. 인간은 타락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말았다. 물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의 잔재가 남아있다.
3. 악인에 대한 형벌(4-6).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의 통제를 받지 않기에, 무법자들처럼 자기 멋대로 산다. 그들은 회개하기를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철저히 무시한 채, 온갖 악행을 일삼는다. 그래서 의인들은 그들에 의해, 마치 포로로 붙잡힌 자들처럼, 핍박을 받으며, 살게 된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절대로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을 대단히 강한 자로, 착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거듭된 악행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증폭시킬 뿐이다. 각자의 행위를, 철저히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그 어리석은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신다. 의인의 세대에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먼저 이들에게, 경고성 징벌을 하심으로, 이들이 회개하도록, 유도하신다. 그러나 끝내 회개하지 않는, 완악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을 내리신다. 그러면 그들에게, 더 이상 회개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무지했음을 한탄하며, 슬피 울고 이를 갈면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
여기서 죄악은 ‘우상과 같이 헛되고, 무익함’을 말한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한 자들이 아니냐? 그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한, 악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로운 자들을 괴롭히는 일이, 습관화되어서, 밥을 먹듯이, 의인을 괴롭힌다.
죄인들은 계속, 죄를 지으면서도, 자기의 힘과 지혜를 믿고, 하나님을 구하지도, 찾지 않는다. 양심에 화인 맞았기에, 악행을 하는 일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한두 번 악을 행하다 보면, 그 양심이, 악에 의해 단련된다. 마치 항생제를 남용하면, 나중에 세균이 침투해도, 항생제가 듣지 않는 것과 같다.
악을 악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즐기게 된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악행하려는 대상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게 된다. 그래서 마치 밥 먹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고, 박해한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불의한 자들에게 박해를 받고, 고난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의한 자들은, 성도들을 박해하면서, 기쁨을 느끼지만, 이런 일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기에, 악인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놀라운 반전이 있다.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 함께 계셨다.
악인이 두려워한 이유는, 의인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인들이, 가난한자들, 억압받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지 못하도록 차단한다. 오직 여호와는, 피난처가 되신다. 악인들이 가난한 자들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도록, 지키신다는 말이다.
인천 상륙작전, 베를린 장벽의 붕괴, 소련의 멸망, 최근 코로나19 사태, 엄청난 폭우 등은,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했음을, 철저히 보여준다. 대적자는 잠잠할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흘러갈 것이다.
결론이다. (7)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 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악인에게서 구원하여, 즐거워하게 하실 날이, 곧 이를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찬양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한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비 진리와 거짓, 또 우상숭배의 포로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할 것이다. 조금만 더 인내하시기 바란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심으로 우리로 즐거워하며, 기뻐하게 하실 날이, 곧 이를 것이다. 주님은 (계22:20中) “…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의 백성들이, 악인들에게 억압을 당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으신다.
그러하여 하나님은 지체하지 않고, 속히 구원하실 것이다. 지체하지 않고 오셔서, 악인들을 심판하고, 의인들로 완전한 구원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이 사실을 믿고, 조금 더 인내하기 바란다.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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